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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지갑이 사라졌다.    
글쓴이 : 박옥희    16-04-13 13:23    조회 : 4,723

         빨간지갑이 사라졌다.
                                                            박옥희

 여름방학 동안 북적대던 손주들을 제 자리에 돌려 보내고 오랜만에 혼자서 대천행 기차를 탔다.
 나는 오래전부터 대천 앞 바다를 좋아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이유도 있지만 치안이 철저해 동반자 없이도 밤바다를 마음놓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밀려오는 바닷물에 맨발을 적시며 긴 모랫길을 걸으면서 나는 한없는 자유에 취해 나를 풀어 놓는다.

 차창 밖에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을 넋을 놓고 보고있던 중 기차는 어느새 대천역에 도착했다. 내 정신건강을 위한다는 핑계로 자주 오고 가면서도 조금 더 기차에 머물고 싶다는 아쉬움은 여전했다.

 개찰구를 향해 가던 중 지갑을 넣어둔 주머니가 허전했다. 지갑이 없어졌다. 눈앞이 캄캄하다는 표현은 이런 경우에 쓰는 거구나. 생각하며 침착하라고 나를 달랬다. 우선 역 사무실로 갔다. 직원에게 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이 빠져나간 것 같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좌석 번호를 묻는다. 놀라운 일이다. 숫자에 약한 나인데 번호가 즉시 떠올랐다. 사람들의 이름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는 평소의 내가 아니었다. 직원이 말했다. 지금 내가 타고온 기차의 승무원에게 연락해서 지갑을 찾아 다음 상행선 열차에 전달 하려면 두시간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찾을 수 있을거라는 자신있는 태도였다. 어찌되건 일단 신고는 끝냈으니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사무실을 나왔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뜨거운 햇볕이 내려쪼이는 대천역 광장 구석 벤치에 앉아 자기성찰 내지는 자아비판에 들어갔다. 평소의 습관을 더듬어 보았다. 주머니에 쑤셔 넣기를 좋아하는 나의 못된 버릇이 만들어낸 사고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보다 혹독하다. 보통의 경우 현금과 카드를 분리해서 양쪽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는 빨간 지갑에 카드와 현금을 몽땅 집어넣었다. 작년 이맘때 청송 세미나에 갔을때도 그랬다. 청송 사과를 택배로 부탁하고 계산을 하려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카드가 없다. 다행히 다른쪽 주머니에 현금이 있어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결국 버스좌석 뒤에 숨어있던 카드가 나와주었다.

 나는 주머니가 많은 옷을 좋아한다. 겉옷이건 속옷이건 어떤 종류의 옷이든 팻션에 우선하여 주머니 많은 옷을 찾는다. 이유는 손에 드는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여자답지 않은 이러한  습관이 언제부터인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타고난 기질이 아닌가 싶다. 이 증세는 여행중에 가장 심하게 드러난다. 마지못해 들고 다니는 핸드백 말고는 작은 여행용 손가방조차 거치장스러워 공항직원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화물로 부치기를 고집한다. ‘공수래 공수거’를 너무 일찍 깨달은 걸까? 거기다 잃어버린 물건도 그다지 아까워 하지 않는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그것이 나를 떠난 것은 미련없이 쿨하게 잊어준다. 애초부터 내 것이란 없는 거라는 어줍잖은 생각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지금의 내 형편을 따져보았다. 그러고 보니 수중에 동전 한푼이 없다. 미얀마에서 맨발의 경험으로 얻은 홀가분했던 무소유의 느낌과는 크게 다르다. 지금의 나의 처지는 무소유가 아닌 무일푼이다. 지갑이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예약해둔 콘도까지의 버스비를 직원에게 부탁해 볼까? 버스비조차 없는 암담한 현실을 앞에두고 무소유를 떠올리는 내가 한심스럽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중 휴대폰 벨이 울렸다.  빨간 지갑이 돌아왔단다. 일단 놀라운 일이다.

 역무원실에 들어가보니 신세대 역무원이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지갑을 내어준다. 지갑은 포장지에 싸여 스카치 테이프에 꽁꽁 묶여 있었다. 확인해 보란다. 제법 많았던 현금까지도 고스란히 돌아왔다. 이런 일도 있구나. 젊은 역무원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숙소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릴뻔했다. 지갑을 찾았다는 기쁨에 앞서 어느새 이만큼 성숙한 우리사회의 높은 민도(民度)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더하여 대천역에서 근무하는 철도 공무원들의 조용하고 성실한 태도에 감탄했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날 밤에도 나는 여전히 맨발이 되어 여름 밤 바다를 거닐었다.
그러나 낮에 겪었던 아찔한 기억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가 없었다.
쏴---
바닷물이 밀려 들어온다.

                                                                                                       2016.<<한국산문>>.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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