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박하면 망가진다
이영희
동창 모임 날짜가 다가오면 그날 입고 갈 옷을 미리 챙기게 된다. 장롱안의 이 커피색 블라우스는 몇 번이나 입고 갔던 것이고 걸려있는 스커트며 바지도 후줄근해 보인다. 보석함 속의 반지나 목걸이로 엣지 있게 장식해보려 했더니 디자인이 밋밋하고 평범한 것들뿐이다. 생각 끝에 쇼핑을 나가 어떤 신상품이 나왔는지 돌아보며 눈요기를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 집을 나설 때는 지갑 안의 현금에 맞추어 마음에 드는 옷만 구입하려 했지만 옷 색깔에 맞추어 진열된 구두와 가방에 절로 눈길이 멈춘다. 어느새 카드를 꺼내들어 예상보다 초과되는 액수를 지불한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두툼한 쇼핑백을 보며 품위유지비로 이 정도의 투자는 당연하다고 자위하며 뿌듯해한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잠깐이다.
다음 달 통장에서 얼마가 빠져나가는지 속셈을 한다. 아무리 빨리해본들 이미 늦어버린 후회가 밀려온다. 통장의 잔액이 줄어든 것을 확인하는 순간은 장롱 안을 뒤적거릴 때보다 짜증은 몇 배나 커질 것이 분명하다. 누구에게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피곤한 욕망인지. 그리고 수입도 없는 여자에게 남편의 직장과 알량한 재산세를 담보로 은행에서 발급해준 신용카드는 이용할수록 빛 좋은 개살구다. 이와 같은 충동구매를 한 날이면 모파상의 〈목걸이〉와 연암박지원의 〈양반전〉이 떠오르곤 한다.
모파상은 목걸이에서 빈약한 가문 때문에 말단 공무원에게 시집간 마틸드가 어느 날, 귀족들이 모이는 화려한 파티에 갈 수 있는 초대장을 받고 옷이며 장신구를 마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틸드는 남편이 꼬깃꼬깃한 비상금까지 내주어 맞춘 드레스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여학교 동창인 부자친구를 찾아가 보기에 값비싸고 호화로운 목걸이를 빌린다. 그녀는 연회장에서 그동안 기회가 없어 보여주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며 파티를 즐기는 시간만큼은 황홀해 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걸이를 잃어버린다. 때문에 비슷한 것을 사서 부자친구에게 돌려주느라 큰 빚을 지게 된다. 모파상은 마틸드에게 빚을 갚게 하느라 십 년 동안 고생시킨 것도 모자라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 목걸이는 명품이 아닌 값싼 짝퉁이었다며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로 만들어버린다.
이 이야기를 표면적 진술에만 집착해서 본다면 그날 밤 몇 시간 동안의 우아한 귀족놀이를 위한 여자의 다루기 힘든 허영심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소설이 끝나는 그 시점부터 비로소 생각다운 생각이 시작된다. 짝퉁 귀부인 흉내를 낸 여자는 마틸드가 아니라 가짜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친구다. 모파상은 소설 안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목걸이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누가 알겠는가. 누가 알아. 인생이란 얼마나 이상하고 무상한 것인가. 얼마나 사소한 일로 자신을 파멸시키기도 하고 구원받기도 하는가.”
그 구원이란 어떤 것일까. 세속적인 구원이라면 속물근성마저 가난한 마틸드에게 부자친구의 뻔뻔함을 배우라는 것이겠지.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했건만 가짜 목걸이를 생색내며 빌려준 부자친구가 복을 받았다. 만약 그런 구원이라면 연암박지원의 양반전은 모파상보다 한 발 앞서 있다.
연암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은 고을의 부자에게 군수를 통해 어떻게 처신해야 양반다운 점잖은 위선의 포즈를 취할 수 있는지 친절하게 하나하나 예를 든 증서를 만들게 한다. 타락한 그 시대의 사대부들에게 은밀한 주먹을 크게 날린다. 그리고 지위와 명예를 돈으로 사고 팔수 있게 된다면 더욱 한심한 세상이 될 것을 염려하는 마음도 들어있다. 군수가 만든 양반 매매계약서의 약관을 듣다가 신분을 샀던 천부는 인간의 탈을 쓰고서 비양심적인 행실은 이웃들에게 차마 못할 짓거리라며 양반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하지만 자기 자리로 돌아간 그에게 신분과 맞바꾸었던 돈 중에 얼마라도 되돌려 주었다는 말이 없다. 거기다 환곡을 갚지 못해 신분까지 팔아버린 양반에게 원래의 지위를 되찾아 주었을 것이다. 결국 군수야말로 자신이 만든 증서의 부당한 특권을 제대로 이용했다. 구원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목걸이〉와 〈양반전>, 두 작품은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닌데도 신용카드로 계산하고 돌아서면, 마틸드처럼 부자친구를 더욱 부자로 만들어준 것 같고, 군수에게 휘둘림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요즘 TV를 보면 방송마다 돈을 빌려 주겠다는 광고가 난무한다. 처음엔 은행이나 이름 있는 대 기업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학생에게까지 카드를 발급해주어 빚을 지게 만들더니 이제는 나라에서 듣도 보도 못했던 사채업자들에게도 교묘한 법으로 돈놀이하는 것을 허가했다.
물건 몇 가지를 카드로 계산한 것을 두고 엄살이 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욕망을 지나치게 억제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구입한 물품에 대한 만족감이나 욕망 해소는 생각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게 늘 문제다. 우리가 쓰는 돈의 대부분은 남을 흉내 내는데 쓰인다는 말이 맞다. 21세기의 마틸드들이여, 깜박하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그 빚이 심히 창대해지리라.
2010년, 한국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