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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이    
글쓴이 : 박유향    17-01-06 09:32    조회 : 4,076

마우이

 

박유향

 

 

압구정동 지하철역 부근에 <마우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캐주얼한 실내장식 때문인지 조금은 불량스러운 느낌이 드는 카페였다. 청바지 차림의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낮은 등걸에 몸을 기대고 하염없이 다리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나도 그곳에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러다가 마우이에 갔다. 카페 마우이가 아니라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진짜 마우이 섬. 짙푸른 바다와 검은 흙, 연두색 풀, 헐벗은 채 분화구를 드러낸 산. 태고 적부터 거기서 살던 흙과 바다와 풀이 아직까지 고요히 숨 쉬고 있는 듯 원시적이고 신비스러운 섬이었다.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서 작은 비행기를 타고 30분 정도 갔다. 20여 년 전 일이다. 마우이 공항에 도착해 활주로에 내리자 뜨거운 태양과 달아오른 아스팔트가 침묵 속에 우리를 맞았다. 원주민들이 느릿느릿 일하고 있는 공항에는 몇 명 안 되는 여행객들이 나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요란스런 와이키키 해변에 있다가 가서 그랬는지 갑작스런 고요가 낯설었다. 슬로우 모션을 틀어놓은 것 같은 마우이 원주민들 움직임 때문에 시간이 느릿느릿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조용한 곳이 그 마우이라는 덴가. 혹시 내가 사는 지구에서 좀 떨어진 행성 아닌가. 떨어져있는 거리만큼 지구보다 공전궤도가 크고 그만큼 시간도 느리게 가는 외딴 행성. 다른 별에 불시착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비행기가 피로한 듯 가만히 서있었다.

공항에서 차를 빌려 예약해놓은 콘도를 찾기 시작했다. 주소만 가지고 목적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휴양지에 왔다는 즐거움도 잠깐, 어딜 가도 일단 길부터 헤메고 보는 신세가 슬슬 짜증나기 시작할 무렵 연보라빛 저녁이 찾아왔다. 맹렬하던 햇살이 한숨 꺾이자 초록색 산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검은 색 산 뒤로 연보라색 하늘이 수채화처럼 묽게 펼쳐지면서 낮과 밤이 살짝 스쳐갔다. 숨어있던 요정이 나타나 마법을 부린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지나자마자, 순식간에 어둠이 덮쳤다. 어딜 봐도 꿈처럼 짙은 어둠이었다. 익숙치 않은 어둠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간신히 숙소를 찾아 가방만 내려놓고 서둘러 식당을 찾았다. 다행히 바로 옆에 중국음식점이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니 실내도 역시 어두웠다. 어둠에 지치는 기분이 들었지만 음식을 기다리면서 테이블 위의 작은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자 비로소 마음이 좀 안정되어 갔다.

 

다음날, 본격적인 마우이 탐험에 나섰다. 하나베이라는 곳은 검은 흙과 연두색 풀이 너무 새것 같아서 어쩐지 성경의 창세기가 연상되었다. 꼭대기에 화산 분출구가 움푹 패여 있던 할레아카라 산을 오르기 위해 구름을 통과했다. 진짜 에덴동산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던 에덴공원을 걸었다. 군데군데 길 가에서 폭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무줄기를 축축 늘어뜨리고 있는 반얀트리와 그밖에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어 굽은 도로에서 커브를 틀 때마다 드라마틱한 절경이 펼쳐졌다.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웠지만 익숙하지 않은 자연이었다. 땅도 낯설고 나무도 바다빛깔도 심지어는 내가 매일 보는 것과 다를 리 없는 하늘과 태양도 낯설었다. 정교하게 꾸며진 세트장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 먼 곳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는 곳마다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하나베이의 장엄한 경관과도 안녕, 발 아래로 구름이 보이던 할레아칼라 산과도 안녕, 백악기 시대 식물처럼 생긴 나무들과도 안녕, 익힐 필요조차 없는 길과도, 피부색 짙은 마우이 사람들과도, 온통 서양인 손님에 모르는 메뉴만 있던 산중턱 식당과도 안녕. 낯선 만남은 동시에 이별이었고, 반가움은 곧 서운함이었다. 마우이와 나는 이렇게 짧게 만나고 동시에 헤어졌다.

 

그렇게 2박3일간의 짧은 마우이 여정은 끝났다. 모든 것이 낯설어 그 섬에 있었던 사흘간 그 곳과 조금도 친해지지 못한 채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작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마우이를 까맣게 잊은 것 같다. 그리고 현란한 야경의 도시 속에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그래서 새삼스런 작별 인사 따위 필요 없는 인연들에 묻혔다. 번잡스런 삶 속에서 원시적이고 고요한 마우이 섬을 떠올릴 일은 별로 없었다.

그 마우이 섬을 깊이 생각해 본 건 그곳을 떠난 후 지금이 처음이다.

그런 일이 있었었지. 카페 이름으로나 알았던 마우이 섬을 가본 적이 있었지. 그곳에서 검은 땅도 밟고, 바닷물을 만지기도 했었지. 길을 잃고 헤메기도 했고 테이블 위 작은 조명이 전부인 어두운 식당도 갔었지.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지금도 마우이 섬은 여전히 짙푸른 바다 위에 떠 있을 것이다. 이 순간에도 그때처럼 아름답고 고요하고 순수할 것이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지고 사방이 연보라색으로 잠깐 물들고 나면 여전히 칠흙같은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다. 검은 흙과 거대한 산이 나처럼 작은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을 말없이 맞아줄 것이다.

 

먼 우주에서 아무 상관없는 별들이 살짝 스쳐 지나가고 또 무심하게 각자 떠도는 것같이, 나와 마우이도 그렇게 서로를 잊고 살아갈 것이다. 별로 친해지지도 못한 채 헤어졌던 우리는 영원히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잊고 그리워하지도 않다가 10년에 한번쯤 무슨 일인가 때문에 잠깐 생각해 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후로 몇 번쯤 더 생각나다가, 결국 영원히 잊혀질 것이다.

지나간 짧은 만남과 헤어짐들을 생각하면서, 잊고 있던 마우이를 떠올리다.

 

(2016 에세이스트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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