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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거지하는 男子    
글쓴이 : 백두현    17-03-02 16:58    조회 : 10,667

설거지하는 男子

 

백두현/한국산문 3월호

 

나라는 사람은 참 보수적인 인간이다. 어려서부터 지독하게도 가부장적인 집안 풍경에 길들어서 그렇다. 어머니는 늘 사내가 부엌 출입이 잦으면 고추가 떨어진다고 하셨고 아버지 역시 모름지기 남자라면 밖으로 돌아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래서 집안 살림은 온전히 여자의 손을 거쳐야 미덕이라 여기며 자랐다. 그런 까닭에 생긴 버릇이라고 여기지만 괴팍하게도 나는 상을 차려주지 않으면 솥에 밥이 있어도 굶었으며 비가와도 좀처럼 빨래를 걷지 않는 이상한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 생각을 부모님 품에서만 지니고 살았다면 그나마 좋았겠지만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것, 결혼 이후에도 나는 그런 신념을 본능적으로 굳게 지키고 살았다. 봉급생활자라 비교적 시간이 많았지만 나의 여가를 집안일에 소비할 생각이 전혀 없는, 말하자면 간 큰 남자였다.

 

그러나 세월은 쇠도 녹이는 법, 슬하에 자식들이 하나, 둘 생기면서 나의 선비정신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는 애를 업고 음식마련에, 설거지에 바쁘게 움직이는 아내를 보며 변심한 것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보면 집안에 우환(憂患)이 든 것이고 아내입장에서 보면 개과천선(改過遷善)한 것인데 아무려면 어떤가. 인간이란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사회적인 동물인 것을. 그래서 설거지라는 것을 난생 처음 해 보았다. 해보니 뭐 별 것도 아니다. 처음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기가 망설여질 뿐, 목욕탕에 때를 밀 듯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그릇을 닦다보니 나름 재미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하는 것도 아니고 명절이나 제사 때 가끔 한 번씩 하는 것인데 뭔 대수인가 싶었다. 그렇더라도 아내 입장에서 보면 경천동지(驚天動地)요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는데 어쩌다 하루일망정 기꺼이 이 한 몸 바쳐 충성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그런 나의 변심이 스스로 호랑이굴로 들어간 것이요, 일종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것을.

 

처음 설거지를 했을 때 아내는 무척 감격했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면 살짝 눈물까지 비치며 그날따라 하나도 힘든지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조금 희생하면 이렇게 평화로운 것을, 내심 변심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러나 감동이란 반복될수록 작아지는 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격은 감사로, 감사는 당연지사로 변질되어 갔다. 그럴수록 줄어드는 감동 지수를 회복하기 위해 나는 맹렬하게 설거지의 강도를 높였다. 그런 눈물겨운 노력을 아내는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칭찬의 질량은 점점 가벼워지기만 했다. 아! 그날 딱 한 번만 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손가락에 생기기 시작한 주부습진을 바라보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렇더라도 어쩌란 말이냐. 본디 천성이 칭찬에 인색한 분과 내가 결혼한 것을.

 

칭찬에 인색하기만 해도 사실은 참을 만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칭찬은커녕 아내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설거지 하는 남편에게 화를 내야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무언의 항변으로 계속해서 설거지하는 소리를 한 옥타브씩 올려봤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기가 찬 것은 화를 내야만 하는 그 말 같지 않은 이유가 스스로 알아서 하지 않고 꼭 시켜야 설거지를 해서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보람 없는 노동이요, 제 발등을 찍었다는 자괴감이란 말인가. 정말로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의 나로 완벽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시는 부엌일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텐데. 아니 어느 날인가 아주 큰 잘못을 했을 때, 평생 딱 한 번만 설거지를 해줄 텐데. 지나간 버스요, 집나간 자식이라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그런 내 마음을 혹시 눈치 챈 것일까. 날더러 설거지를 하지 말라고 했다. 혼자서 할 테니 바둑이나 두라는 거다. 아! 고진감래(苦盡甘來)라더니 진심은 결국 통하는 것이라고 잠시 착각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을 생각해낸 탓이다. 그런데 아니다. 덜그럭 덜그럭 설거지를 끝낸 아내는 설거지는 됐으니 돈을 달라고 했다. 같이 하던 걸 혼자 했으니 일당을 요구한 셈이다. 설거지하고 혼나는 것보다야 백 배 난 일이라 감지덕지(感之德之)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신사임당 한 장을 건네긴 했지만 뭐 이런 경우가 있다는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남자들에게 선지자로서 충심으로 한 마디 권한다. 남편들이여!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설거지에 달려들지 말도록 하자. 처음부터 내 일이라고 뼈 속 깊이 인정하거나 칭찬이 없더라도 묵묵히 일할 머슴정신에 충실한 사람만 도전이 가능한 일이다. 더불어 세상의 모든 아내들에게도 부탁의 말이 있다. 설거지하는 남편 칭찬에 결코 인색하지 말라. 설거지가 조금 깔끔하지 않더라도 칭찬하고 또 칭찬하고 볼 일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조금 고깝더라도 계속해서 칭찬하고 또 칭찬하다보면 밖으로는 쉼 없이 일하는 충직한 노예를 얻는 일이요, 안으로는 돈 안들이고 사표를 던질 수 없는 완벽한 도우미를 얻는 방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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