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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않는 길    
글쓴이 : 박소현    12-05-13 11:09    조회 : 4,401
가지 않는 길
 
 
  밤하늘에 별무리가 소리 없이 쏟아진다.
  겨우내 얼었던 개울물이 녹아 대지의 잠을 깨운다.
  수면제다. 사람을 부동의 자세로 만드는 묘약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잔잔한 파도인가 하면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인, 결코 현란하지 않는 현(絃)의 넉넉함, 그리고 풍요로움. 어느 하나 튀지 않는 아름다운 조화. 하나의 틀 속에 자신을 맞추는 지극한 겸손과 어우러짐.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수백 명의 청중들은 스스로 휴대폰을 끄고 숨소리마저 죽였다. 누구인가, 겁도 없이 저 많은 사람들을 숨죽이며 얼어붙게 하는 이.

  나는 지금 예술의 전당 음악당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무지치(I MUSICI) 실내악단〉의 창단 50주년 기념 연주를 듣고 있다. 1952년, 이탈리아의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한 젊고 유망한 음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실내악단을 만들고 앙상블을 이루기로 뜻을 모았다. 바이올린 6명, 비올라 2명, 첼로 2명, 더블베이스 1명, 하프시코드 1명으로 이루어진 12명의 단원들은 누구나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휘자를 두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서로 호흡을 맞춘다고 한다. 한번 입단하면 병들거나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악단의 멤버로 남는다는 전통을 가진 그들이지만 창단 50년이 된 지금은 창단 멤버로 70세로 동갑인 더블베이스의 ‘루치오부카렐라’와 그의 부인인 하프시코드 연주자 ‘마리아 테레제 가라티’ 만이 남아있다. 40대 후반에서 70대까지로 구성된 연주자들은 잔잔한 그들의 음악만큼이나 편안해 보이는 표정과 넉넉함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

  내 양 옆으로는 중학교 2학년인 아들과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이 나란히 앉아 있다. 나는 곁눈질로 슬금슬금 둘의 표정을 훔치고 있다. 음악에 취해 단원 하나 하나의 몸동작까지 살피는 아들에 비해 딸은 음악을 수면제 삼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결코 적지 않은 돈으로 좋은 좌석의 표를 사서 악단의 정면에 앉는 사치를 누리게 된 건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하겠다는 아들의 꿈을 접게 한 미안함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하는 남편의 작은 배려 때문이었다.

  아들은 어릴 적부터 음악이 나오는 곳이면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18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설악산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물건을 파는 곳에서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팔을 잡아끌어도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정신없이 춤을 추자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순식간에 아이를 빙 둘러싸고는 박수를 치며 같이 환호했던 적도 있다. 그때 찍었던 사진을 보면 유난히 숫기가 없는 지금의 아들이 이상할 정도다. 지독한 음치 아빠와 몸치 엄마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돌연변이가 나왔을까?
  무엇이든 두드려 소리를 구별해 들어보고 음악만 나오면 그곳이 어디든 수시로 엉덩이를 흔드는 아들에게 세상을 좀 더 여유롭게 살아가라는 마음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게 한 건 여섯 살 때였다. 피아노는 2년 정도를 하고 그만 두었는데,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바이올린은 꼬박 8년을 배우게 되었다. 전공을 시킬 생각도 아니었고 단순히 취미로 하는 거라 연습을 게을리 한다고 나무란 적도 없었다. 그저 선생님 시키는 대로 두고 보기만 하였다.
그런데 이사를 하면서 선생님과 헤어지게 되어 바이올린을 할 수 없게 되자 아들은 전공을 하겠다며 레슨을 받게 해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전학 온 학교 음악선생님의 학교 오케스트라에 들어오라는 말과, 지금 실력으로도 웬만한 예술고 진학이 가능할 것 같다는 언질 때문이었다. 전학을 와서 정붙일 곳이 없어서 일시적으로 생긴 마음의 변화라고 생각한 나는 자신의 장래를 그렇게 즉흥적으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며 아들의 마음을 돌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주위에서 쉽고 화려한 것만을 좇다가 실패한 사람을 여럿 보아 왔다. 특히나 예술 분야에서의 선택은 각별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조금의 재능만 보이면 앞 뒤 가리지 않고 그쪽만 보고 뛰다가 뒤늦게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닫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아들에게 내가 아는 여러 실패사례들을 이야기하면서 아울러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 중에 음악 전문가 못지않은 애호가들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또한 전공을 할 생각이었으면 좀 더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했었다는 언급도 잊지 않았다.
  아들이 6학년 때 제법 이름 있는 음악경연대회에 처음으로 나가게 되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예선을 거쳐 결선 무대에 오른 많은 아이들, 그들의 손에 들려진 수백, 수천 만원을 호가한다는 악기들 앞에서 아들의 연습용 바이올린은 확실히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였다. 이미 여러 대회에서 수상(受賞)한 적도 있다는 그들은 서로를 익히 알고 있었던지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방인인 우리들이 신기했나 보다.

  “어느 선생님 한테 배워요. 레슨비는 얼마 줘요?”

  질문이 이어진다. 단순히 시험 삼아 나와 봤다는 나의 말에 그들은 안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름을 대면 금방 알만한 선생님을 사사하느라 내 상상을 초월한 레슨비를 지출하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면서 반주자로 따라 간 내 친구도 이번 대회는 어려워서 자기 학원에 다니는 애들은 한 명도 출전하지 않았다며 떨어져도 실망하지 말라고 위로를 한다.
  그런데 수상자 명단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그 많은 아이들을 제치고 아들이 초등학생 고학년 부문에서 2등이었다. 잠시 멍한 기분이 되어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잘못 본 게 아닌가 해서 다시 수상자 명단을 확인했다. 충격을 받은 건 전공을 시키겠다고 많은 돈을 투자한 다른 아이들의 엄마였다. 수상 경력이 곧 상급학교 가는데 가산점이 되는 마당에 그들은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것이고 심혈을 기울여 연습도 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만 같았던 아이들, 기쁜 마음 이면에 미안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 후로 한 번도 그런 대회에 내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우쭐거리다가 정작 해야 할 다른 것에 소홀해질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신 수상 기념으로 아들의 키에 맞는 수제(手製) 바이올린 을 사 주며 축하해 주었다.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 드보르작의 <두개의 왈츠>에 이어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뮤직>이 끝나고 잠시의 휴식을 거쳐 귀에 익은 비발디의 <사계(四季)>가 연주된다. 이미 ‘이무지치 표’로도 더 잘 알려진 사계!
깊은 잠에 빠진 겨울나무가 봄기운에 녹은 물기에 놀라 화들짝 잠을 깨고, 더위에 지친 나뭇잎에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쏟아진다. 유리알처럼 차고 투명한 겨울을 껴안는 초로의 신사들이 연주하는 그들만의 음악은 엄마품처럼 포근하고 따스하다.
  아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접어둔 꿈들을 꺼내 살짝 들춰보는 것은 아닐까?

  ‘아들아, 너는 네 꿈을 버림으로 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취미로 하는 너의 바이올린 연주는 너 더 돋보이게 하겠지만 네가 그것을 직업으로 선택했을 때를 생 각 해 보아라. 끊임없는 연습과 다른 사람과의 경쟁, 그런 것들로 인해 너는 스트레스와 더 많은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엄마는 내 아들이 벌써부터 그런 경쟁에 뛰어드는 게 싫구나. 세상을 살다 보면 싫든 좋든 경쟁해야 하는 일들이 수없이 많단다. 소중한 것은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지만, 막상 그것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의 허탈감을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것이다. 조금은 모자란 듯, 평범 속에서 자신의 삶을 곱게 가꾸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엄마는 감히 말하고 싶구나.’

  나는 아들이 투박한 질그릇이었으면 한다. 청자나 백자처럼 화려해서 눈길을 끌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정이 느껴지는, 오래 써서 손때 묻은 질그릇처럼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기를 바라고 싶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예정된 연주가 끝이 났다. 관객들은 기립박수로 그들의 연주에 열광하고 아쉬워 한다. 손을 흔들며 단원들이 하나하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진 뒤에도 박수는 그칠 줄 모른다. 잠시 뒤 한복으로 갈아입은 그들이 무대 위로 다시 올라와 우리 가곡 <님이 오시는지>를 연주 할 땐 본 연주에 못지않은 감동 그 자체였다. 자신들의 음악을 듣기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내 준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그 나라 고유의 옷을 입고 연주를 함으로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그들. 자신들만의 잔치가 아닌 나누고 공유하는 지극히 순수한 행위를 통해 그들은 관객에게 보답했다. 결코 꾸미지 않는 소박한 모습과 진정 음악을 사랑하고 평생의 동반자로 살아가는 그들이 보기 좋았다.

  “엄마, 저 할아버지 정말 부러워요.”

  나는 못들은 척 그들의 연주가 실린 CD한 장을 사 주는 것으로 딴청을 피운다. 세월이 흐른 뒤 아들이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쯤, 자신이 가지 못한 길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 엄마가 자신의 인생에 좋은 조언자였다고 생각할까, 아님 자신의 꿈을 꺾었다고 두고두고 원망할까? 음악에 취해 예술의 전당을 나서는 사람들 머리 위로 소리 없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2002년 5월 《책과 인생》등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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