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거워진 시간의 걸음
정민디
겨우 걸었다. 나는 늘 모든 것을 겨우 한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것 보다 겨우 라도 하고 있는 자신이 대견하기도 했다. 대단한 뜻을 갖고 걸은 것은 아니다. 그저 한국의 산과 들,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나라 밖에서 살다 보면 때때로 필요 이상 애국자가 되고 고향을 그리워한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먼저, 미주문협 회장 임기를 마친 김동찬씨가 국토종주를 계획하고 있는데 같이 걷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처음에 다섯 명이 모였다. 우리 일행은 길을 가며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들이라는 뜻에서 서로를 도사로 부르기로 했다. 생긴 그 자체가 도사인 김동찬, 공동경비의 수금과 지출을 담당했던 정민디는 그야말로 날으는 돈(돼지 돈자 아님) 도사다. 사카 도사(사진과 카페에 글 올리는 책임을 진)인 임흥식, 좀처럼 말을 안 하는 침묵도사 채영준, 남자보다 더 통이 큰 배포도사 정영란 이렇게 도사 다섯이 길을 떠났다. 보석장사 정영란만 빼고는 모두 백수였는데 보석은 가격이 높아 충동 구매하는 사람이 없어 예약 손님만 받으면 된다는 그녀는어디든 문 닫고 떠날 준비가 늘 되어 있었다.
5월 10일 해남 땅 끝 마을에서 출발하여 꼬박 일 주일은 각종 신음으로 버텨냈다. 첫날에 이어서 둘째 날 까지도 30 킬로미터 이상을 걷고 나니 물집이 여러 군데 잡혀 버렸다. 셋째 날은 반갑지 않은 비가 와서 빗물이 운동화로 스며 들어와 발의 물집이 불어 터져 만신창이 됐다. 신발이 제일 문제였다. 우리는 충분히 신발에 중요성에 대해 논의했지만 뾰족하게 또는 자신 있게 안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무조건 가벼운 것이라야 된다, 아니다 평소 신던 등산화가 좋다 그저 그런 의견에 그쳤다. 나중에 겪고 알게 된 결론은 제 아무리 충직한 발도 지나치게 오래 부려먹으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발한테는 무척 미안했지만 지레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라남도는 어떻게 든 걸어내고 싶었다. 왜냐하면 매일 새로 맞이하는 도시마다의 강력한 메뉴가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게 무침, 세발낙지, 짱뚱어탕. 꼬막, 밴댕이젓, 갓 잡은 한우 고기, 그리고 천지빛깔의 나물들과 밑반찬. 이들 음식과 함께하는 반주에 취했다. 어찌 그 뿐 이랴. 전라남도 길에도 취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너른 평야에는 드문드문 허리 구부러진 농부들의 움직임만이 오로지 고즈넉한 동적현상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노래하는 뻐꾸기 소리에 맞춰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듯이 보였다. 밥을 만들기 위해 모를 심는 그들의 모습은 ‘벌이’ 로는 볼 수 없는 숭고한 맥을 잇는 예술 작업이었다. 그 곁을 나는 ‘벌이’는 안 하고 는적는적 계면쩍은 걸음을 걷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일행 중 누군가는 어쭙잖게 배낭에 태극기를 꼽고 있었다. 적어도 뭔가 하고 있다고 표시라도 내고 싶었을 게다. 편치 않은 걸음걸이로 장흥에 이르러 동네 평상에서 쉬고 있던 중, 동네 할머니께서 딱하다는 표정에 궁금증을 보태어 한 말씀 하신다.
“ 이렇게 걸어 다니면 나라에서 돈 주요?”
“ 네? 아,아니요......”
“ 돈도 안 주는 데 뭣 할라고 들 고생을 장만하고 다닌 다냐?”
맞다. 우리는 돈도 안 주는데 돈 쓰며 고생을 장만하여 등짐 지고 다니고 있었다.
고된 발 노동을 끝낸 저녁식사에 쌈빡한 단골메뉴는 도사들의 꼼수였다. 지도가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뚫어지게 살펴 지름길을 찾고 또 찾는다. 거리를 단축하기위해 터널을 지나고, 산을 넘고, 때로는 내를 건너기도 했다. 시원한 아침에 많이 걸어 두려고 아침 7시면 어김없이 간밤에 잤던 숙소 마당에 모였다.
5월 16일 전남 화순에 도착 했다. 많이 지쳤다. 다시 폭우 소식이 있었다. 우리는 안양산 자연 휴양림에서 하루 휴양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 발은 다시 폭우 속을 걷기가 힘든 상태여서 서울로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려니 아픈 발만큼이나 마음이 저려왔다. 서울에 돌아와 일주일 남짓 쉬는 동안 미국에서 온 아들과도 지내고, 발의 물집도 꾸들꾸들 해져 다시 떠났다. 내가 평소 신던 등산화와 발가락양말로 재정비를 했다. 짐도 지난번 보다 반으로 줄였다.
5월 23일 전화를 많이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이다. 우리 일행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분의 공과나 그분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 혹은 정치이념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분이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니. 일행은 그날만은 침묵도사가 되어 걸음걸음 명복을 빌었다.
5월 25일 그 동안 집에 앉아서 지도를 보고 또 보고 지름길을 실시간 안내해준 지도 도사 최대승이 합류했다. 그가 편안한 길이라고 일러준 지도에 빨간 줄로 쭉 그어진 길이 사실상은 굽이굽이 고개를 7개나 넘은 험준한 길이었다. 우리는 지도도사 자격을 박탈하고, 벌과금을 두둑이 가지고 당장 내려오라고 호출했다.
5월 28일 드디어 문경새재를 넘는 날이다. 문경은 옛날 서울로 과거를 보러갈 때 그 곳을 지나면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다른 지방의 선비들 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했다고 한다. 우리도사들에게 ‘기쁜 소식’은 오늘만큼은 딱딱한 아스팔트 없이 맨발로도 걸을 수 있는 푹신푹신한 황토 길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국토를 걸어오면서 처음 흙길을 만난 셈이다. 그럴싸해서인지 새재를 넘으니 배포도사 정영란은 예약폭주의 기쁜 소식으로 보석 팔러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새재에 마지막 관문을 지나 산을 하나 넘으면 구수한 충청북도가 나오고, 굽이굽이 산길을 도는 빛나는 강원도, 비릿한 동해에 바닷길을 따라 산전수전 해탈한 발로 6월 3일 마지막 귀착지인 고성 통일전망대 까지 갔다.
통일 전망대에서 도사들은 만세를 불렀다. 24일간, 무사히 걸어 마치게 된 것을 자축하며, 통일이 어서 이루어지기를 빌며, 하루도 쉬지 않고 걸어준 발에게 대견함을 표하며, 도사들과 후원자들에게 감사하며 등등..... 각자의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생각들이 일었을 것이다. 통일 전망대에서 본 북한 땅은 고요했다. 시퍼런 동해바다에 면한 모래밭 가운데 검은 둑으로 보이는 군사분계선으로 인해 우리 땅 걷기는 반쪽만 걸었던 미완성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인생배낭에서 짐을 줄이는 연습도 했다. 시간의 걸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의 변화가 있었고, 빛의 사그라짐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왔다. 알 수 없는 또 다른 갈망이 몰려왔다.
2013년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