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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의 풍경화    
글쓴이 : 공인영    18-01-25 18:21    조회 : 6,780

               

                                        8월의 풍경화

                                                                     

  정수리를 쏘아대는 땡볕 앞에서 잠깐 망설였다. 그래도 양보할 수 없어 양산을 활짝 펼쳤다.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미술 전시[아시아 대학생, 청년작가 미술 축제(Asian Students and Young Artists Art Festival)] 안내를 보면서 젊은 예술가들의 문화적 칼라와 상상력이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행사 작품은 거품을 뺀 가격에 판매도 한다니 살짝 호기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1호선 서울 지하철역의 개찰구 앞은 예나 지금이나 분주했다. 이제 그 위로 기차뿐 아니라 고속철까지 생기고 보니 더 많은 인파를 토해내느라 환승하는 통로마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에스컬레이터로 지하를 올라와 역전 마당으로 막 나서는데 젖은 바람 한 줄기가 뺨을 핥으며 지나갔다. 지하철로 오는 동안 서울엔 비가 내린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보였고 그 위로 풍경 몇 조각이 촛농처럼 떠 있었다. 하늘, 구름, 바람의 숨결, 그리고 그 숨결이 만들어 내던 아득한 심연의 느낌도 함께 

 전시가 열리고 있던 구() 서울역 역사(驛舍)는 오랜 세월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장소이자 날마다 주인공만 바뀌는 이별 드라마의 장기 공연장이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민자 역사가 신축되면서 잠시 폐쇄된 뒤에도 예술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전시할 장소를 제공하고 후원하며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표를 사기 위해 건물 입구부터 꼬리를 문 행렬 뒤로 가서 줄을 섰다. 지나가는 비에 아스팔트 바닥의 물기는 진즉 말라버렸고 닿는 것마다 녹여버릴 기세로 다시 불볕이 쏟아져 내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햇볕을 고스란히 떠안고 선 사람들의 표정에도 더위가 찐득하게 들러붙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양산도 무용지물인 이런 날씨에 어찌 사람만 예민해질까. 발밑에서 종종거리던 비둘기들도 더는 안 되겠는지 그늘을 찾아 건물 처마께로 옮겨 앉기 시작했다. 눈앞에 낯선 풍경 하나가 들어오기 시작한 게 그때였을까.

  그건 마치 새로 산 핸드백 속에서 부끄럽게 튀어나온 낡은 손수건처럼, 깔끔하게 단장된 새 역사 주변에서 드러나던 한 무리의 노숙자들이었다. 전시장까지 오는 동안 몰랐는데 가만 보니 한둘이 아니었다. 구석에 신문을 깔고 돌아눕는 깡마른 사내, 술병을 움켜쥔 채 눈이 풀린 노인, 불쑥 다가서 행인들을 뒷걸음치게 만들던 젊은 남자 그리고 어느새 근처까지 와 있던 몇몇까지, 잿빛 덩어리로 움직이던 그들은 도시의 끝으로 밀려난 생의 부유물들 같았다. 실물로 다가온 노숙자의 모습은 우리가 안전거리에서 바라보던 화면 속 그들보다 낯설고 섬뜩했다. 함께 꿈꾸는 이상과 현실의, 이 몹쓸 괴리(乖離)와 잠시 맞닥뜨리는 일만으로도 슬그머니 불편해질 즈음 매표소 앞 차례가 되었다.

  밀려들어간 전시장 안은 사람들로 초만원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엄청난 양의 전시물들은 보기도 전에 주눅이 들게 했다. 하지만 작정하고 나섰으니 부지런히 돌아보기로 했다. 과연 대학생들과 청년 작가들의 표현은 자유롭고 신선했으며 기발했다. 간혹 해학과 풍자가 담긴 작품 앞에선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번 전시엔 아시아의 젊은 작가들도 참여해 삶 속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디자인과 색깔로 거침없이 풀어내며 관람객과 소통하고 있었다. 주머니 사정만 허락됐더라면 맘에 드는 작품 하나쯤 사서 그 감각과 재미를 가져오고도 싶었다. 그중에 조금 특별했던 것은, 사진 속 건축물의 윤곽을 색색의 네온사인으로 홈질하듯 이어 붙여 돌출시킨 대형 작품이었는데 뜻밖에 남편의 회사 건물을 모델 삼은 것이었다. 반가움에 열심히 들여다보며, 어렵게만 느껴지는 현대 미술과 일반인 관람객의 거리를 좁혀주고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기회도 제공하는 이런 축제의 취지가 제법 맘에 들었다.

 그러나 1층과 2층을 돌다 보니 너무 많은 입장객들의 말소리와 발걸음들이 뒤엉켜 차분하게 감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관람 태도도 중요하지만 하루 관람 인원에 제한을 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결국 3층까지 다 둘러보지는 못한 채 여전히 북적거리는 입구의 사람들을 헤치고 전시장을 나와야 했다. 그래도 여느 전시회를 몇 군데나 구경한 것보다 더 많은 작품들과 만날 수 있었으니 분명 행운이었다.

  밖은 수만 가지 색깔과 형태로 쌓였다가 부서지며 문명의 시간을 넘어온 도시 위로 오후가 후줄근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근처 어디선가 음악소리도 들렸다. 궁금해 따라가 보니 이국의 사내들이 좌판에 시디 한 무더기 놓고 노래와 연주를 하고 있었다. 커다란 모자에 색색의 화려한 망토를 두른 이방인들의 목소리는 구성진 피리 가락과 함께 이곳까지 흘러든 나그네들의 사연을 담은 듯 애달파 지나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연주는 한참 동안 이어졌고 듣고 있던 구경꾼들이 하나 둘 빠져나갈 때마다 그 자리로 어둠이 위안처럼 스며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노래하던 이들과 구경꾼들, 노숙자와 비둘기들 그리고 멀리도 가까이도 아닌 채로 늘 근처나 기웃거리던 나의 오래된 불편함까지 순식간에 하나로 뭉개버렸다.

   모처럼 전시회가 한여름 더위에 말라가던 몸과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돌아오는 밤기차 안에서, 다음번엔 모든 작품을 보고 오리라 다짐하며 그림 대신 좌판에서 고른 시디를 만지작거리는데 누군가 내게 묻는 것 같았다. 오늘 본 작품 중 어느 게 맘에 들더냐고. 그야 물론 젊은이들의 꿈이 담긴 작품 전부를 꼽아주고 싶으면서도 왠지 이 도시 한 복판에서 절망과 허무의 몸짓으로 휘청거리던 회색 풍경화 몇 점도 마음 벽에 나란히 걸어두고 싶어졌다.

                                                                                      < 2015 현대수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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