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노래
박유향
8월 한가운데 있는 광복절 날엔 맹렬하게 달리던 여름이 주춤하고 서서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같다. 잔뜩 달아오른 열을 식히기 위한 이 하루의 멈춤은, 이미 끝난 휴가 후에 덤으로 하루 더 주어진 휴가이기도 하고, 정확하게 언제인지 모르고 지나가는 입추라는 절기의 현실적인 날짜 같기도 하다. 게으르게 휴일을 보내고 남편과 가까운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얼마 전 새로 문을 연 낙지철판구이집이었다.
남편은 오랜만에 먹는 낙지철판구이에 감탄을 했다. 그 고유한 맛뿐 아니라 그 맛과 소주와의 환상적인 조화에 대해. 한국인은 이 맵고 뜨거운 맛과 소주의 궁합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나 뭐라나.
그러면서 남편은 한국음식의 우수성에 대해 이야기했고, 난, 조금 딴소리로, 인간이 가지는 미각의 보수성에 대해서 말했다.
날은 광복절이겠다, 나는 왜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라를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해 얘기했고, 남편은, 역시 딴소리로, 한국인의 우월함에 대해 말했다.
난, 남편의 평소와 다른 광복절기념 애국성 멘트를 늘 그렇듯 무덤덤하게 들었고, 남편은, 나의 반응 없음에 항상 그렇듯 상관 않고 계속 이야기했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정치적 문제에 목소리를 높였고, 난, 맨날 그렇듯 냉소로 가장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잔에 반쯤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남편은 현실과 미래의 삶에 대해 얘기했고, 난, 낙지를 우물거리고 씹느라 제대로 듣지 못 했다.
나는, 내 엄마에 대한 얘기와 앞으로 태어날 조카에 대해 저번에 했던 이야기를 또 했고, 남편은, 처음 듣는 얼굴로 지난번에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에 대해 ‘착하고 건강하게 커줘서 기쁘다’는 데 간만에 의견이 합치됐고, 앞으로의 교육방침에 대해, 항상 그렇듯 견해가 조금 충돌됐다.
술잔을 자꾸 비우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늘 그렇듯 남편의 음주에 대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남편은 맨날 그렇듯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술잔을 채웠다.
우리는,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80세가 넘는다는 얘기를 했고, 우린 건강하다면 아마 90살까지는 살게 될 것이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앞으로 내가 살아나갈 시간을 잠깐 생각했고, 짐작 컨데, 남편도 그러는 것 같았다.
식사를 하는 사이 창밖의 해질녘 회색하늘은 어두워져 있었고, 삼삼오오 모여 앉은 식당의 손님들은 우리와 비슷한 속도로 취해가고 있었으며, 조금 들뜬 얼굴을 한 사람들이 늦여름 밤거리를 지나갔다.
누군가는 연휴를 끝내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었을 테고, 또 누군가는 하루 늦게 시작하는 다음 한주를 나른하게 기다리고 있었을 테고. 멀리 바닷가 어딘 가에선 여름이 막바지 화려한 춤을 추고 있을 테고, 여름을 견디고 있는 어떤 사람은 지나가는 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남편과 나는 조금씩 딴소리를 하며 이 여름을 보내고 있고, 습기와 사연을 머금은 밤공기가 부유하고 있었고, 어딘가에서 풀벌레가 작은 소리로 울었을 테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선 가을이, 해마다 만나서 이제 많이 친해진 가을이, 늘 그랬듯 이곳에 오기 위해 바스락거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