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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할 수 없는 날을 기억하며    
글쓴이 : 박유향    18-02-09 00:00    조회 : 5,082

기억할 수 없는 날을 기억하며

 

박유향

 

몇 해 전부터 해마다 참석하고 있는 한 모임의 송년회 소식이 들렸다. 무심코 뚜벅뚜벅 걷다보면 일정 거리마다 밟히는 둔턱처럼, 별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다보면 어김없이 해가 바뀌는 것이다. 일 년 전 이맘때와 똑같이 겨울코트와 내의를 꺼내며 일 년 전 이맘때처럼 지나간 한 해를 생각했다.

일 년 동안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이켜 본다. 연말에는 언론에서도 10대 뉴스니 뭐니 하며 꼽지 않는가. 나도 세어보자. 생각해보니 참 옹색하구나. 명절을 보냈고,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선거에서 투표를 했고, 여름휴가를 다녀왔고....그 외엔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 몇 날을 빼곤 다른 모든 날들은 개인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날>들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아무 것도 기억할 것 없으며,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어 영원히 이별해야 할 날들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동안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아이는 바지가 껑충 짧아질 정도로 자랐으며, 나는 그만큼 늙었고, 내 부모님은 당신의 남은 나날 중 일 년을 보냈다. 우리 가족은 쌀을 약 100kg정도 먹었고, 조기와 고등어를 100마리 정도 먹어치웠으며, 김치는 50포기정도 소비했다. 아이는 매일 학교에 가서 한 해 동안 습득해야 할 지식을 쌓았으며, 남편은 한 식구가 살아갈 경비를 마련하느라 경제활동을 했고, 나는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집안일을 거르지 않고 했다. 틈틈이 글을 썼고, 남편과 몇 번인가 다투고 화해한 경험을 했으며, 친구들을 만나 잡담을 나누고, 생활비를 아껴 약간의 돈을 모았다. 매달 말에 공과금을 내고, 거의 매주 주말 시장을 봤으며, 거의 매일 저녁 국을 끓였다.

이런 모든 일들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일어났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모월 모일에 일어났던, 기록조차 할 필요 없는 일들일 뿐이다. 평범하고 사소했던 하루하루였다. 기억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눈앞에서 반짝이던 잔물결이 흘러가 강물의 흐름에 섞이듯, 사소하고 작은 일들은 금새 흘러갔다. 나는 매일 매일 전날과 비슷한 잔물결을 보며 지나간 일을 빠르게 잊어나갔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억하지 못하는 날들은 바로 나의 삶이다. 아이가 자라고, 남편과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마트에 가서 비슷비슷한 물건들을 사들이는 것 외에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다. 기억할 수 없는 날들 속에, 영원히 잊혀질 날들 속에, 나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것이다. 반짝이는 잔물결이 사실은 흐르는 강물인 것처럼 평범하고 소소한 일들이 나의 삶인 것이다.

나는 내년에도 그 다음해도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하고 사소한 날들을 살 것이고 또 기억하지 못한 채 떠나보낼 것이다. 그리고 이 기억하지 못하는 날들은 쌓이고 쌓여서 나의 일생이 되고 삶이 될 것이다. 아이를 뒷바라지 하다보면 아이는 어른이 될 것이고,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집안일을 반복하다 보면 나는 어느덧 늙어있을 것이다. 함께 잡담을 나누던 친구들은 나와 같은 속도로 나이가 들 것이며, 둔턱을 밟고 뚜벅뚜벅 걷다보면 어느새 먼 거리에 가있을 것이다.

올해의 마지막 달을 맞아 올해의 기억하지 못하는 날들, 그러나 나의 전부였던 날들을 기억하며 기록을 남긴다.


<2018 한국산문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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