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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복 이야기    
글쓴이 : 윤기정    19-07-21 23:02    조회 : 4,310

중복 이야기 

윤기정 

  이름은 '중보기' 라도 무방하고 '중복' 이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녀석의 이름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중보기' 로 하는 게 낫겠다.‘중복' 으로 했다가 그날이 제 명줄 끊기는 날이란 걸 혹시라도 녀석이 눈치 채고 가출을 한다든지 극단의 선택을 하면 개 주인이 나에게 책임 추궁을 할지도 모른다.

  녀석을 처음 본 건 아침 햇볕 따뜻하던 봄이었다. 동네 빈터에 복분자 ? 마늘 ? 콩 농사를 짓는 영감이 올 농사 궁리라도 하는지 담배 연기 폴폴 날리며 밭머리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갓 젖 뗀 성싶은 조막만 한 강아지 한 마리가 쪼그려 앉아 주인 영감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심심해서 키워 보려고 하나 얻어왔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걸어온다. 그 뒤로 영감 발치를 얼쩡거리던 녀석을 몇 차례 본 듯도 하였으나 곧 잊었다. 할 일 적은 백수라도 남의 강아지에 유념할 까닭은 없었다.

  며칠째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날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려는데 뒤에서 개가 그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그 녀석이었다. 제법 성견 티가 났지만 꾀죄죄한 모습이며 힘없이 그르렁대는 낮은 소리며 겅중겅중 걷는 걸음이며 어디에서도 뼈대 있는 가문의 징표는 찾을 수 없었다. 견종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개 중에도 기품과 우아함을 뽐내는 녀석들이 있는데 중복이에게는 어느 한 군데 그런 구석이 없어 보였다.

  개도 주인을 닮는다더니 귀티는 안 나도 순박한 눈망울에 약간 눈치 없어 보이는 표정이 영락없이 주인 영감을 빼닮았다. 불쑥 나타난 녀석에게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짐을 들지 않은 한쪽 팔을 휘저으며 저리 가라고 쫓는 시늉을 하는데'괜찮아요. 안 물어요.' 라는 느긋한 영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느긋함에 기분이 상했다. 두려운 표정으로 엉거주춤 개를 쫓는 모습을 보인 것도 속상했다. '개를 집 안에서 키우셔야죠.' 감정을 누르고 애써 편안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던졌다. 지켜보던 아내를 앞세우고 여전히 뒤쪽에 신경을 쓰면서 대문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마당과 텃밭이며 울 밖을 둘러본 아내가 내게 마뜩잖은 얼굴로 말했다. 담장 옆 도로에 배설물 한 무더기가 있는데, 아무래도 영감네 개가 한 짓 같단다. 아침에 혼자 마을 길 돌아다니는 꼴을 봤단다. 증거가 없으니 영감에게 뭐라 할 수도 없고 더러운 건 내 집 주변이니 치울 수밖에 없었다. 집 안 잔디밭에 길고양이 배설물도 매일 한 차례씩 치우는 데다가 옆집 개의 것까지 치워야 하나 생각하니 부아가 났다. 증거를 잡아서 풀어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그날 분꽃 필 무렵 애완용 작은 개를 기르는 동네 마나님과 밭을 살피러 나온 아랫집 아주머니를 집 앞에서 만났다. 저녁이면 한 차례 개를 데리고 동네길 산책을 하던 마나님은 큰 개가 해코지할까 봐 산책을 그만두었단다. 아랫집 아주머니도 대문을 열어둘 수가 없다고 불만이었다. 요즘 개를 놓아 기르거나 목줄로 묶어서 다니지 않으면 개 주인에게 법적으로 책임을 묻는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웃 간에 그렇게까지 말할 일은 아닌 듯하여 잠자코 지냈는데, 여러 사람의 의견이라면 전달을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다음날 영감을 만나서 마을 사람들의 불편함을 전했더니 개를 풀어놓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면서 어차피 중복 때까지만 데리고 있을 거란다. 윗마을 사람들에게 중복에 넘길 텐데 피부병이 생겨서 좀 풀어놓은 거란다. 중복까지가 아니라 단 하루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야하겠느냐는 말을 겨우 참고 돌아섰다. 그날 이후로 녀석을 입에 올릴 때면중보기라고 불렀다.

  영감은 혼자 산다. 마누라와 이혼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아들과 시집간 딸도 자주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주하는 가족이라곤 털이 뭉텅뭉텅 빠져서 벌건 살이 여기저기 드러난 볼품없는 녀석, ‘중보기가 유일한 셈이었다. 어쨌든 중복까지라니 어쩌겠는가, 기다릴 수밖에. 며칠 후 또 일이 터졌다. 약조 뒤로는 영감이 외출할 때는 대문을 닫아걸어 녀석을 집안에 가두었다. 약속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어느 날 잔디를 깎으며 밖을 보니 영감 차가 안 보였다. 녀석을 가두고 나갔겠지 짐작하며 문을 열어놓은 채 잠깐 쉬러 들어갔다가 나오니 일이 벌어졌다.

  텃밭 쪽에서 중보기가 유유히 나타나더니 나를 보고는 꽁지가 빠져라 제집으로 도망쳤다. 언짢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나타난 텃밭 쪽 산뜻하게 깎아놓은 잔디 위에 무언가가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중보기' 그 녀석의 짓이 틀림없었다. 당장 영감네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 새 영감 차가 들어와 있으니 집에 있을 터였다.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 파자마 차림으로 나와서 얘기를 듣더니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놈이 언제 또 나갔나. 묶어 놔야지.' 하고는 그만이다.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서 있었더니 예의 그중복까지만타령이었다. 아내가 그깟 일로 다툴 것 없다며 잔디밭의 배설물을 치웠다. ‘중복까지만이야기를 듣고부터는 불쌍해졌단다. 중복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참으란다.

  드디어 중복! 며느리가 해산한 지 한 달밖에 안 돼서 복 놀이는 생략하였다. 대신 삼계탕으로 산후 보양 겸 복달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가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문득 중보기의 거취가 궁금해졌다. 영감 집 담 밑으로 걸어가는 기척에도, 일부러 발을 굴러 봐도 낮은 소리로 그르렁대는 녀석 특유의 반응이 없었다.‘중보기가 중복에 갔구나.’ 생각하니 눈치 없는 듯, 겸연쩍은 표정으로 겅중거리며 돌아다니던 모양새가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이튿날 새벽 호박밭 옆에 담배 한 개비 꼬나문 영감이 언제나처럼 쪼그려 앉아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곁에는 지난 어느 봄날의 풍경처럼 '중보기'가 쭈그려 앉아 영감과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녀석이 살아 있네요?' 녀석 앞에서는 차마 대놓고'중복'이라 부를 수가 없었다. '비쩍 말랐다고 안 가져가네요.' 무심한 듯 대꾸하면서 영감이 투박한 손으로 '중보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중보기가 영감의 무릎께에 제 머리를 문질러 댔다. 동쪽 하늘 새벽 놀이 유난히 붉던 날이었다.

한국산문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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