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을 넘긴 한 무리의 아낙들이 지하철 엘리베이터 앞에서 수다중이다. 요즘 애들은 신랑에게 오빠라고 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이 내 귀에 풀 먹은 벽지처럼 착 달라붙는다. 아마 내가 그들의 대화 말미 부분을 우연히 듣게 된 모양인데, 시작은 알 수 없었지만 짐짓 수다에 귀 기울이게 된 것은 신랑에게 오빠라고 부른다는 말에 폭죽 터지듯이 깔깔 웃는 그들에게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을 칭하는 전통적으로 쓰던 호칭 외에 오빠, 아빠, 등으로 부르고 있는 일상을 자주 접하기는 하지만 수긍하는 편은 아니다. 예전에 우연히 남편에게 아빠라는 호칭은 적절치 않다고 토론하는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인식이 박혀서 그런지 듣기가 거북하고 민망하다. 사실 오빠나 아빠는 손위 사람이다. 한날 한시에 성혼한 부부가 왜 손위 사람이어야 하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연상의 아내에게 누나, 혹은 엄마라고 호칭하는 남편들이 있는가. 이런 호칭 하나에도 남성우위 정서가 묻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빠라고 많이 부르던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오빠로 부르는 게 대세니 그나마 위로인 셈인데, 그 변천사를 생각해보면 아내의 위상이 조금 나아 진 듯도 하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려들어가자 화장품냄새, 향수, 땀 냄새와 뒤섞인 세재냄새, 그들이 먹은 음식냄새까지 따라 들어왔다. 이쯤 되면 냄새조차도 수다다. 그들의 일상이 그려졌다. 원하지 않게 그들의 한나절을 복기하는 사이 아낙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수다를 풀어 놓는다.
키우던 고양이가 식탁에서 떨어졌는데, 척추가 부러져서 기천만원의 수술비를 들여 살려 놓았다고 한다. 보통 고양이는 낙법에 능하여 높은 데서 떨어져도 다치는 일은 없는 줄 알았는데 낮은 데서 떨어지면 다치기도 하는 모양이다. “아이고 저런 돈도 많이 썼네!” “아무렴 당신네 고양이 복 받았네 그려,” 일행들의 반응이 왁자하다. 사람 외에 움직이는 생명을 들이기 꺼려하는 나로서는 낮 설지만 그렇다고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그대로 두었더라면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을 고양이가 주인을 잘 만나 살게 되었으니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복 받은 것도 사실이다. 문득, 수술비가 없어 병원에서 죽어간 고교 시절의 옛 친구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래 고양이 구완은 누가 하누?” “그거야 어미가 잘 하고 있지.” 옳거니!, 그녀들의 수다는 내 관심의 과녁으로 날아들고 있다. ‘어미!’ 물론 어미 고양이를 뜻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그 주체가 사람이었을까, 고양이였을까. 그 논리는 어쩌면 캣맘을 인식하는 차이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길 고양이를 건사하는 여성을 뜻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새끼 고양이를 양육하는 어미고양이라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조금은 현학적인 논제이긴 하나 그들의 수다에 나도 한번 오지랖을 펴 볼 생각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거기까지였다. 대부분의 수다가 그렇듯이 그들의 자랑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누구나 집에서 키우던 동물에 대한 추억 하나 쯤은 지니고 있다. 우리 집에서도 개를 키웠다. 우리가 먹고 남은 음식을 먹었으니, 한 솥 밥을 먹는 사이였고, 동생과 내가 등하교 할 때는 경호원이었으며, 무료할 때는 같이 놀아준 친구였지만, 방으로 들어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야말로 개답게 키웠다. 강아지가 성견이 되어 개장수에게 팔려 갈 때 아주 잠시 스친 눈 마주침, 그 애틋함이 아직도 기억 한 구석에 짠하게 남아있는 걸 보면 ‘정’ 그 이상의 끈끈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개의 그 이후는 모른다.
애완동물이 실내에서 생활하고부터 사람과의 관계는 더 가까워 졌다. 더러는 유전자 변형으로 장난감처럼 작아졌다. 팸팻족, 애완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며 삶의 반려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은 가축을 기르는 일과는 다르다. 먹고 남은 음식을 주는 게 아니라 그들만의 사료가 있고 간식이 있다. 먹이고 씻기고 배설물을 치우고, 삶에서 죽음까지 주인이 책임을 지는 데야 그 교감이 오죽할까. 거기다 주인의 슬픔과 외로움을 인지하여 필살의 애교로 달래주기까지 한다. 무심한 가족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법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생각하며 부모를 자청하는 이들이 생겼다. 심지어 동물을 다루는 방송매체에서는 대놓고 엄마, 아빠라고 거리낌 없이 말 한다. 그러나 교감이 남다르다고 해서 그 개체의 엄마여야 하는가. 애칭이라 한들 고양이 엄마, 개 아빠, 어디 그 뿐인가, 어느 집에서는 아기가 어릴 때는 먼저 키우던 반려동물이 언니였다가 아이가 성장하자 위치가 바뀌어 있다. 그야말로 개 족보인 셈이다. 반려동물이라 하여 점점 인간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걸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개와 고양이만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언어는 문화이며 생활이고 의식의 표현이다. ‘엄마’ 앞에 가족 누군가의 이름을 붙인다면 듣는 사람도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웃의 사위가 장인 장모에게 어머님, 아버님이라 부른다고 법도를 운운하며 혀를 차는 어른들을 보고 자랐다, 그 말인즉 장인 장모는 나를 낳아준 부모가 아니란 뜻이다. 또한 가족이라 해서 모두 내게 엄마라고 하진 않는다. 아들은 엄마라고 부르지만 며느리는 어머니로 구분 짓는다. ‘엄마’ 는 어머니의 준말로써 오직 자식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호칭이다. 사람에게는 엄마가 있고 동물에게는 어미가 있다. 제 아무리 반려동물을 자식처럼 애지중지 해도 어미 개, 어미 고양이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물에게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것을 인식 시켜 줘야 하고, 사람은 사람을 그리워해야 한다.
결국 오지랖을 풀기는커녕, 말 한마디 거들지 못하고 나 홀로 수다를 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