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발라 먹어
이성화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그날따라 혼자 집에 가는 중이었다. 집까지 채 100m도 남지 않았는데, 어떤 아저씨가 우산을 씌워 달라며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왔다. 낯선 사람과 같이 가는 게 너무 싫었지만 잠시만 가면 우리 집이니 거기까지만 가자 싶었다. 몇 발짝 걷던 남자는 소변이 급하다며 개천가 끝으로 갔고 나는 얼결에 우산을 들고 따라갔다. 지나다니다 보면 그쪽에서 노상방뇨하던 사람들이 종종 있었는데, ‘눈앞에서 이걸 봐야 한다니, 어쩌지?’ 하는 순간 벌써 바지지퍼 내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고 그냥 갈까 하는데, ‘쪼르륵’ 소리 대신 이상한 소리가 났다. 헐떡거리는 놈을 팽개치고 집까지 100m 달리기를 했고, 어쩐지 무섭고 죄지은 것 같은 마음에 아무에게도 말을 못 했다. 지금 같으면 ‘이런 씨 발라 먹을’ 같은 욕을 퍼부을 일이지만 그땐 어째야 할지 몰라 가슴만 콩닥거렸다.
요즘 아이들은 그런 상황에 절대로 따라가지 말라는 교육을 받는다. 싫은 일을 강요당하거나 위험하다고 느끼면 ‘안돼요, 싫어요, 도와주세요!’를 크게 외치라고. 그때 그런 교육을 받았더라면 바로 옆집 대문을 두드려 도와달라고 했을 텐데. 그 길옆으로 다 아는 이웃들이었으니까.
아이들, 특히 딸을 키우면서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걱정하는 얘기를 종종 나누게 됐다. 그러다 보니 내 또래 여자들이 어린 시절 나처럼 성추행을 당했던 일도 듣게 되었다. 생각보다 그런 일들이 많았고 나처럼 어쩐지 혼날 것 같아 아무에게도 말을 못 했다고 했다. 잊고 있었다가 생각났다는 듯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큰 트라우마가 되어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씨 발라 먹을 놈들’이 많이 있었다니.
TV만 틀면 나오는 ‘놈들’의 이야기에 어르신들은 ‘요즘 것들은’으로 시작해서 ‘쯧쯧쯧’으로 끝나는 한탄을 많이 하신다. 그렇지만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 고대어로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쓰여 있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어른들에게 요즘 것들은 언제나 쯧쯧거릴 일만 하는 놈들이다. 문제는 요즘 것들이 아니라 피해자를 보는 시각이다. 분명 잘못은 가해자가 했음에도 피해자에게 ‘네가 어떤 빌미를 주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라는 시선. 가해자의 인권은 보장해주려고 하면서 피해자의 마음은 헤아려주지 않는 분위기. 한순간 잘못된 선택, 혹은 유혹으로 앞날이 창창한 가해자를 범죄자로 만들면 안 되니 선처를 부탁한다고 하면서 앞날이 창창한 피해자가 평생 가슴에 안고 가야 할 아픔은 좀 참으면 될 일로 치부하고 만다. 왜 피해자가 참아야 한단 말인가.
옛말에 ‘참을 인(忍)’ 자 세 개면 살인을 면한다고 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내 눈에 보이는 참을 인(忍)은 마음에 칼을 품고 있는 모양새였다. 아이들과 온종일 붙어있다 보면 참을 인을 하루에도 삼천 개쯤 헤아리곤 했다. 그러다 결국 오밤중에 안자고 떠드는 아이들을 향해 참았던 마음을 폭발시켜 칼을 휘두르는 꼴이었다. 아이가 국을 엎질렀을 때 참지 않고 ‘엄마가 치우기 힘들어서 네가 실수인 걸 알지만 화가 난다.’고 말했더라면, 아이들이 싸웠을 때 ‘너희들이 싸우면 엄마가 속상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다.’고 말했더라면, 아이가 뛰어내리다 넘어져 울 때 ‘네가 위험한 행동을 하면 놀라고 걱정돼서 소리부터 지르게 된다.’고 말했더라면. 그렇게 감정을 보여주고 달래고 싸우고 화해하며 하루를 지냈더라면, 놀고 싶어 밀려오는 잠을 참는 아이들의 마음에 뜬금없는 생채기를 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아이들이 우는 걸 싫어했다. 다른 집 남자들도 대체로 그렇다고 들었다. 아이들은 슬플 때만 울지 않았다. 화나고 속상해도 울고, 억울하고 분해도 울고, 미안하고 민망해도 울음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그럴 때면 쓸데없이 눈물을 보인다고 혼낼 때가 있다. 감정표현이 쓸데없는 것은 아닐 텐데, ‘남자는 태어나 세 번만 운다’는 쓸데없는 교육을 받고 자란 탓인가 싶었다.
이렇게 감정을 누르고 참는 것이 좋다고만 배우고 자라서 정작 피해자가 되어 화를 내고 항변해야 할 때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함께 화내고 항의하는 대신, 가해자의 입장에서 참을 것을 종용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니 무조건 참으라는 것보다는 가해자도 뭔가 잘못이 있었다는 당위성이 필요했을 테고.
어느 날 5학년 딸아이가 “씨발라 흥흥”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기에 깜짝 놀랐다. 요즘 초등학생들도 욕을 말끝마다 달고 산다더니 내 딸도? 알고 보니 말춤으로 유명한 가수 싸이의 노래 가사에 ‘생선을 먹을 땐 가시 발라먹어 수박을 먹을 때는 씨 발라먹어’라는 부분 중 ‘씨 발라’였다. 제목은 <I LUV IT>이고 전체적인 가사 내용으로 봤을 때 욕설은 아니지만, 어감으로 봐서는 심의에 걸리겠다 싶었다.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방송 부적격이었다. 딸아이가 흥얼거리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는데, 묘하게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입에 착착 감기는 가사에 나도 모르게 그 부분을 흥얼거리고 다녔다.
어쩌면 대놓고 욕하지 못하는 대상에게 노랫말을 빌어 분을 풀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나를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에게. 피해자라고 드러내놓지 못하게 한 세상에게. 감정을 꾹꾹 눌러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나 자신에게. 어쩐지 시원해지는 것이 카타르시스란 게 별거 아니구나 싶다.
누군가의 ‘참을 인’ 자를 대가로 어딘가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씨 발라 먹을 놈’들에게 한순간 욕구와 충동으로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참을 인’ 자를 썼어야 했다고, 앞으로는 제때 ‘참을 인’자를 쓰지 못한 ‘놈’들을 제대로 응징하는 세상이 될 거라고 말하고 싶다.
2018.3. 동인지 <열일곱, 그들의 봄>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