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인디언
진연후
인디언(?)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그가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독특한 생김새에 반해 특별히 잘 둔다고 한 것이 어디에 놓았는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한형(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이 성별 구별없이 ‘형’이라 칭함)이 미국 여행길에 사온 선물은 책갈피, 그러니까 북마크였다. 철로 만들어져 무게감이 느껴졌다. 읽다 만 책에 꽂아 두면 인디언이 한 발을 들고 나팔을 불면서 밤새도록 춤을 추었다. 나팔 소리를 따라가면 자연에 순응하며 소박하게 살던 체로키족의 ‘작은 나무’도 만날 수 있고, 어떤 이야기도 그대로 들어주던 ‘모모’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시?공을 넘나들며 만날 세상을 생각하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취향과 다른 책 선물보다는 아무 부담없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책갈피 선물이다. 글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선물 사는 센스까지 있는 한형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가볍게 하고, 어떤 책에 꽂아둘까 고민하던 것에서 기억이 끊어졌다.
몇 년 전, 어릴 때 쓰던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보니 책갈피가 수십 개도 넘게 나왔다. 너무 오래되어 코팅지가 떨어지고 색이 바래, 원래는 어떤 색깔의 그림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짧은 시가 적혀 있기도 하고 나뭇잎이나 꽃잎을 눌러서 코팅한 것들도 있었다. 책갈피는 읽고 있는 책에 사용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많이 모아두었다가 뭘 하려 했을까? 책갈피 뿐만이 아니다. 엽서며 우표 등 당시에는 예쁘다고 생각해서 오려놓았을 사진, 그림들. 그리고 삼중당 문고판 책 사이사이에 꽂혀있는 나뭇잎들까지. 나는 그런 것을 왜 모아두었을까?
애써 모으고 몰래 숨겨두고 그 다음엔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지금도 여전히 보내지도 않을 엽서나 편지지를 사고, 하나면 충분한 것들 - 예를 들면 필통이라든가 파우치 - 을 두 개 세 개 갖고 있으면서도 또 사고 싶어진다. 사 두었다가 나중에 되팔아서 목돈을 만들 수 있는 금궤나 명품가방도 아닌 쓸모없는 것들을 모으는 건 무슨 심리인가?
법륜 스님이 고향을 방문했을 때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곳에서 택시기사를 하는 어릴 적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스님과 죽마고우였다는 걸 자랑하며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공부뿐만 아니라 뭐든 잘 했다고. 스님은 구슬치기도 잘 해서 친구들 것을 몽땅 따버려 구슬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스님은 구슬을 가득 담은 항아리인가 자루인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린 시절 이야기를 친구에게 듣다보니 무척 부끄러워졌다. 그 구슬이 뭐라고. 친구들 것을 모두 따서 집에 보물처럼 보관했을까. 그것을 친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더라면 지금 친구가 구슬치기를 잘 했다는 기억보다 그것을 나눠준 마음씀씀이를 자랑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지금도 구슬을 대신해 또 뭔가를 끌어안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나는 내 것이라고 움켜쥐고 있을 만한 물건이 없다. 쓸데없는 걸 끌어안고 있는 것이 비단 물건만은 아닐 텐데, 보이지 않는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정약용은 재화를 비밀리에 숨겨 두는 방법으로 남에게 시혜(施惠)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고 했는데, 나눌만한 가치도 없는 물건을 모으려고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누어 주지도 못할 미움이나 욕심 대신 기꺼이 나누고도 줄지 않을 마음을 키우라고 친구는 인디언을 선물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나팔을 불어줄 인디언은 어디에 있는 걸까? 책갈피를 선물해 준 한형의 깊은 뜻을 헤아려 이 책 저 책 읽다보면 나타나려나. 오늘도 나는 인디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책장 앞을 서성인다.
2019년 10월호 좋은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