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익조 (比翼鳥)
오길순
보문사
눈썹바위 벼랑길
키 작은
아내 어깨 꼭 부여잡은
키 큰
白色지팡이 남편
외눈박이 외 날개
비익조 전설인양
핫 둘! 핫 둘!
1인2각
쏜 살 같은 메아리
사백열아홉 계단
땀 젖은 숲 속을 울리고
간절한 108배
마애석불좌상 미소에
낙가산
타는 노을
석모도 수평선
서해바다
어느새
붉은 연화대 되었네.
2019.10월호 월간<심상>
박주가리
오길순
‘이게 무슨 향기래?’
목욕탕 문틈 새로 들어오는 상큼한 향기, 뒷집 판자울타리에 매달린 덩굴 꽃이었다. 1,5미터 쯤 되는 곳에서 보내온 향기는 향수처럼 달콤 상큼했다. 이 폭염에도 묵묵히 일하는 농부가 그러할까? 세상 소식 쯤 아랑곳없다는 듯, 엄지손가락만한 꽃송이들을 다닥다닥 매달고 번지점프 하듯 벼랑에 늘어진 박주가리에게 사랑의 눈인사를 보냈다.
박주가리에 관심을 가진 것은 홀씨 때문일 것이다. 향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도깨비 방망이
처럼 못생긴 열매에서 토해내는 순결한 씨앗날개 때문이기도 하다. 만삭의 임부가 옥동자를
생산하듯 꽁꽁 잉태했던 향기가 씨앗으로 영글어 터질 때면 우산 같은 홀씨날개들은 소망의
풍등인 양 눈이 부시다. 하늘하늘 오르는 씨앗날개들은 어디론가 가뿐히도 떠간다.
박주가리는 민들레처럼 홀씨로 번식한다. 손가락 두어 개 만 한 표주박 같은 몸속에 포개진 수많은 씨앗들은 참으로 경외스럽다. 명주실 낱 같은 씨앗날개들이 가로로 착착 포개진 질서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울 일이다. 드디어 개미 눈보다 작은 홀씨가 우산처럼 날개를 펼쳐들고 높이 비상 할 때는 어두운 사막에서 점등사를 만난 양 마음이 환해진다. 몇 년 전 어느 작고문인 참배 길이었다. 어린 날 뛰놀던 곳에 뿌려달라는 고인의 유언대로 그의 유골은 동산에 뿌려졌다고 한다. 솔밭 쯤 어디에 그의 문학의 얼이 서려 있을까, 해거름 가을 동산 길을 두리번거리며 걷는데 누군가 조용히 외쳤다.
“박주가리다!”
오가는 이들의 발길에 밟히고 차였으면서도 오톨도톨 사마귀처럼 돌기가 그대로 맺혀 있는, 손가락 두 개 쯤 되는 초록 열매였다.
“박주가리가 이렇구나!”
신기한 눈으로 보는 순간 어느 문인이 한 개를 뚝 따주었다. 고인의 문향인 양 고이 싸들고 온 어느 날, 누렇게 변한 박주가리를 마당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단단하던 박주가리 배가 터지더니 날개들이 마구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만삭을 열고 비상하는 박주가리 옥동자에 놀란 듯, 곁에 있던 남편도 웃음이 가득했다.
어미닭과 병아리의 줄탁동시가 그러할까? 슬쩍 건드렸는데도 찰나에 삐져나온 생명의 씨앗들. 이 순간을 기다려 온 듯 튀어나온 그 흠결 하나 없는 순백의 날개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먼지만한 씨앗들이 매달려 하늘을 떠 갈 때는, 열기구나 낙하산도 박주가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 같았다. 홀씨를 매단 솜털은 낙하산처럼 펼쳐져 가뿐히도 날아갔다. 단풍나무 씨앗에서 헬리콥터가 응용되었다더니 박주가리 솜털이 도장밥인 인주의 재료인 것도 알았다. 누가 저리 고운 것들을 박주가리라고 이름 지었을까?
이후 들녘 길을 지날 때면 풀숲을 둘러보곤 한다. 어디서나 꽃 피고 열매 맺는 박주가리가 반가웠다. 세상을 향기로 채울 듯 말없이 스스로를 경작하고 정화하면서도 순결하기만 한 잡초에게 홀로 인사말을 건넸다.
지난 해 이른 아침, 동네 어귀에서 달콤한 냄새에 이끌렸다. 주말농장 펜스에 주렁주렁 매달린 박주가리 꽃이었다. 해바라기와 넓은 호박잎 아래 조용히 숨어 있는 꽃향기, 보라색 라일락처럼 이슬을 타고 다가온 향기, 순간 밤새운 여름의 열기도 몸에서 사라지는 듯싶었다.
그 후 박주가리 몇 개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미 뱃속에 차곡차곡 누웠던 순결한 씨앗날개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순간, 그들도 소망의 점등사를 만난 양 기분이 환해졌을지도 모른다.
박주가리는 세상 온갖 소요에도 묵묵한 사람들을 떠올려준다. 누구의 칭찬도 포상도 바라지 않고 지고지순 몫을 다하는 사람들. 옆집 목욕탕까지 향기로 씻어준 박주가리처럼 오염된 세상 인간향기로 채우는 그런 사람들. 한 송이 백련을 옹배기에 채워놓고 서늘한 백련차 한 잔으로 여름의 분진을 씻어주던 탄허박물관 보살의 미소 같은...
(1) <비익조> 작품 후기
몇 년 전 뜨거운 여름날, 강화 석모도에 갈 기회가 있었다. 하루 현장 학습 가는 장애인들을 모시고 문학 강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전세버스에서 만난 광경은 참으로 감동이었다. 장애가 있는 이들을 1:1로 모시고 떠나는 봉사자들의 얼굴이 천사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마침 낙가산 눈썹바위 벼랑길을 오르는데 벌써 108배를 끝내고 내려가는 두 사람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날개를 단 듯 빨리 내려가는 두 사람, 앞 선 여성의 두 어깨에 두 손을 얹고 구령을 붙이며 뒤 따라 가는 남성은 백색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순간 전설의 새, 외눈박이 외 날개, 사랑의 비익조가 그러할까 싶었다. 혼자서는 날지 못한다는 비익조. 둘이어야만 날 수 있다는 새.
모두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2) <박주가리> 작품 후기
풀숲에 마구 너부러진 잡초들을 보노라면 세상을 올곧게 지켜가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누구의 칭찬도 포상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청정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 마치 향기 가득한 박주가리 같다. 해가 비추이는 곳이면 어디든 씨앗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 박주가리 향기는 라일락 향기 못지않다. 연보라색 작은 꽃에서 신비한 향기가 난다. 실은 색깔이나 꽃모양이 라일락과 서로 닮기도 했다.
꽃이 지고 나면 그 자리에 못생긴 과육이 덩실하니 열리는 박주가리 결실은 특별하게 보인다. 스스로 품은 향기로 혼탁한 세상을 말없이 정화하는 사람들 같다.
2019.10월호 월간<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