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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정’과 냉정 사이    
글쓴이 : 박병률    19-12-06 21:37    조회 : 5,880

                

                                               ‘절정과 냉정 사이

 

  “일본은 가고 싶지 않단게!”

  “다 가는디, 매형만 빠지면 어쩐대유.”

  경상도가 고향인 처남이 내 고향 전라도 사투리를 써가며 하루가 멀게 전화를 했다. 처남이 흉내 내는 사투리가 어찌나 어설픈지 한바탕 웃고 말았다.

  “매형, 웃은께 겁나게 좋네.”

  “알았은게 전화 후딱 끊세.”

  “매형, 승낙을 받기 전에는 전화 안 끊을라요.”

  처남은 이참에 뭔가 뿌리를 뽑을 태세였다. 형제 모두 해외여행을 목적으로 매달 얼마씩 회비를 냈는데 아랫사람한테 고집을 피우며 버티다 보니 한편으로 미안했다. 처남과 한바탕 말씨름하다가 두 손을 들었다.

  “그려, 같이 가세.”

  9남매가 34일 일정으로,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지 약 2시간 만에 일본 간사이국제공항에 도착했다. 00이라는 한국 사람 가이드와 인사를 나눈 뒤 버스를 타고 동대사로 향했다. 가이드가 말하길 부처님 복원할 당시 백제문화가 건너왔다는 문서가 나왔다며절 입구에서 대불전으로 걸어가는 땅바닥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돌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중국 돌, 우측에는 한국 돌, 그 옆에는 일본 돌이 놓여있단다.

  가이드가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일본은 절대 바가지를 씌우지 않으니, 먹는 즐거움과 쇼핑의 즐거움을 누리라고 권했다. 그 덕분에 문어빵도 먹어보고 약국 구경도 했다. 약국에서는 오만가지 생활용품도 팔았다. 유후인에서 고로케도 맛보고 커피를 마셨다. 구마모토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소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다음 날 오사카성에 들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이 있었는데 왼손에 칼을 쥐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눈길이 칼에 쏠렸다. 칼끝에서 조선을 침공한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가 되살아났으므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조상들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빼앗겼고, 징용과 징병, 위안부 등 학교에서 배운 우리나라 역사가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는데, 3·1절을 코앞에 두고 일본 여행이라니.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이육사의 시 절정을 떠올렸다.

?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시를 되새김질하며 벳부 온천에 들렀을 때였다. 여섯 군데의 땅바닥에서 진흙이 부글부글 끓고 수증기가 올라왔다. 불구덩이에서 일본 노인이 보여주는 이벤트가 일품이었다. 담배 연기를 한 모금 입에 물고 수증기 가까이 다가가서 뿜어댔다. 수증기와 담배 연기가 합쳐지면서 뿌옇게 동산처럼 커지자, 노인이직이네라고 부산 사투리를 써가며 분위기를 띄웠다. 온천을 거쳐 갈 때마다 그 모습은 재현되었고, 노인은 호루라기를 후, 후 불면서 우리 일행더러 셋 넷외치라고 했다. 나는 어릴 적 선생님 따라 소풍을 가듯 큰소리로 , .” 하며 노인의 뒤를 따랐다.

  일본인이 자기네 땅에서 우리말을 하라고 부추긴다(?) 일본이 싫어서 여행 안 간다고 처남한테 큰소리칠 때는 언젠데, 노인을 따라다니는 동안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도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일본은 골목마다 주차된 차량이 한 대도 없었다. 고층 건물마다 역삼각형 표시가 유리에 빨간색으로 드러나 있었고, 아파트 베란다는 이웃끼리 왕래할 정도로 윗부분이 뚫려있었다. 우리나라와 다르다고 가이드한테 묻자, 비상시 사용하기 위한 수단이란다. 일본인들은 뭐든지 원칙이 있고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닐뿐더러 남한테 피해 주기를 싫어한단다.

  그런 까닭인가. 일본에 잠시 머무는 동안 이육사의절정이라는 시는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나는 다행히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일본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인천공항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일본 풍경을 떠올려가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뒷좌석에 있던 처남이 내 어깨를 잡아당기며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려 처남을 바라보았다.

  “매형, 일본 여행 억수로 재미있었는교?”

  처남이 웃으면서 내 표정을 살폈지만 엉뚱한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 그래서 일본은 작은 차나 작은 집들이 많고, 길거리에서 휴지나 담배꽁초를 볼 수 없었구나!”

 

                                           성광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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