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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함을 그리다    
글쓴이 : 봉혜선    20-03-03 13:06    조회 : 4,059

투명함을 그리다

봉혜선

 

  투명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 미술학원 원장에게 슬며시 말을 비쳐 본다. 원장은 얼마든지 간단히 그릴 수 있다고 격려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나 보다. 단박에 시작한 친구가 그린 투명한 정물과 꽃을 보니 부럽다. 쭈뼛거리기만 하고 용기를 내지 못해 한 자락 한숨을 보탠다. 오늘도 눈 감은 텅 빈 시간이 내 몫이다. 그런데 투명한, 투명한 그림이라.

   연전 왼쪽 눈을 수술했다. 한 달 반 간격으로 세 번을 수술대에 올랐어도 정작 그 때뿐이었다. 보이는 세상이 곧바로 흐릿해졌다. 남편과 간호사 출신 동네 언니의 걱정스런 부축을 받으며 응급실을 찾았다. 죽을듯하다는 호소에 눈 아파 죽는 사람은 없다는 의사의 메마른 대답이 돌아왔다. 응급을 나타내는 분홍 종이를 들고 급히 받은 수술은 결과가 썩 좋지 않았나 보다. 옆 침대 환자들이 다 나가도록 커튼 안에 갇혀 있었다.

   눈을 수술한 환자들 방은 무거운 정적과 더불어 깊은 어둠에 잠겨 있기 마련이다. 위로의 말조차 힘이 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주위의 도움이 오히려 짐이 될 것 같아 혼자 더듬거리며 택시를 타고 퇴원했다. 눈 속에 물이 차오르도록 한 달 반 동안 엎드려 있어야 했다. 일어나기는커녕 엎딘 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의 시간이란! 음악도 눈으로 듣는다는 걸 처음으로 체감했다. 순간의 길이가 영원하다는 깨달음도 내 것이 되었다.

   눈이 차츰 나빠져 가는 중에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왕성한 활동을 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것을 두고 보르헤스가 아니라 노벨상의 수치라는 말이 남았다. 존 밀턴(1608-1674)은 시력을 잃고 <<실낙원>>을 지었다.

   나는 늘 투명함을 꿈꾸고 그리워한다. 두 눈을 뜨고 보아도 일부러 감고 보는 것만큼 못하니 밝고 맑은 시야는 사라졌다. 더운 여름이면 투명함에 대한 동경이 더욱 깊어진다. 가을엔 공활하고 맑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투명함을 그린다. 겨울의 쨍하는 냉기는 투명함을 닮았다. 봄 역시 모든 시작처럼 순수해서 순도 높은 투명함에 가깝다.

   투명함에 대한 관심은 여기저기로 뚫려 있기도 하다. 아침 이슬이 맺혀 웃는 모습, 커다란 연잎에 동그란 물방울이 또르르르 구르며 움직이는 모양,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 드는 햇빛, 소리만 나지 않는다면 사랑스러울 선풍기 바람이 일으키는 원형의 궤적. 투명한 얼음을 만들고 싶어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끓여 식힌 물을 얼린다든가, 물 사이의 공기를 뺀 냉장된 물을 써본다든가. 얼음을 가득 넣은 유리컵 두 개를 겹쳐 놓아 네 겹이 되면 마음도 따라 맑아진다고 여긴다.

   어린아이의 타고난 자연 그대로의 웃음소리, 그 나이 되도록 파란 힘줄이 드러나는, 스물일곱 살 조카의 손등, 깊이를 모르는 바다에 들어찬 물의 투명함까지. 순도 백 퍼센트인 투명함이 무엇보다 좋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쉬지 않고 돌아가는 모양이 보이는 시계도 투명함을 겨냥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액자의 그림과 벽걸이 시계의 숫자와 유리판 사이에 투명함이 보인다. 연하게 내린 커피에도 투명함이 있다. 창을 스치듯 빠르게 날아가는 새의 꼬리에서 투명한 끝을 본 듯하다.

   어린 시절 겨울 아침 처마 끝에 매달린, 크기가 각각인 고드름에서 영롱한 투명함을 보았다. 오빠보다 먼저 큰 고드름을 차지하고 싶었다. 오빠가 그걸 가리키며 차지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맑고 차가운 촉감에 더해 바깥세상이 환히 드러나 보이는 고드름은 양보하거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번 칼싸움에서 져주겠으니 내 고드름은 따지 말라고 부탁했다

   친구가 자랑 삼아 보여주는 그림을 한참 보다가 거길 왜 비워 두느냐, 투명한 무슨 물감이라도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원장은 말로는 전하지 못하는 비법이라도 있는 양 미소만 짓는다. 눈치 빠른 친구는 해봐, 금방 배워!”라며 호기심과 궁금증을 부추긴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여우를 통해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투명한, 투명한 그림이라. 그런 그림은 어떤 그림일까? 대상과 여백이 조화를 이룬 그림이거나, 액자 밖 풍경 너머의 경치를 보여주는 그림? 아니면 눈을 감았을 때 더욱 선연히 살아나는 그림?

   한겨울 냉장고에 있던 소주를 컵에 부었을 때의 쨍한 투명한 맛을 입이 아닌 무딘 손끝으로 느껴보려던 건 욕심으로 밀어 둔다. 지금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돌이킬 수 없고 가질 수 없게 된 투명한 시야를 그리워한다. 본다는 것은 나에게 완성을 뜻한다. 선명함을 찾는 노력이 전에는 느끼지 못하고 보이지도 않던 밝은 눈을 만들어 준다. 마음이 그리는 투명함은 홀로 고고하다. 정말 투명하다는 것은.

 

봉혜선

서울 출생

ajbongs60318@hanmail.net

                                                                                            (한국산문 2019.12. 등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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