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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같은 드라마    
글쓴이 : 이성화    20-03-16 17:53    조회 : 4,170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같은 드라마 

이성화

여덟 살 아래인 내 남동생은 초등학생 때 종종 오락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다 엄마에게 잡혀 끌려오곤 했다. 그때는 동전 몇 개면 온종일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동생은 고등학생이 되자 PC방에 다니기 시작했고, 엄마는 동생을 잡으러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맸다.

요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VR 게임장이라는 게 나온다. 엄청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고글처럼 생긴 VR 헤드셋을 착용하면 눈앞에 게임 화면이 3차원으로 펼쳐지고, 본인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게임을 하는 사람은 실제로 좀비가 달려드는 듯한 모습에 땀범벅이 되도록 총을 쏘고 몸을 움직이며, 비명을 지르면서 펄쩍 뛸 정도로 놀라기도 한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혼자 발버둥 치는 모습에 웃음이 터진다.

몸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프로 게으름러인 나는 좋아하지 않는 게임이다게임이란 모름지기 이불속에 푹 파묻혀 누워서 할 수 있는 모바일 게임이 최고란 생각이다.

휴대폰 속으로 들어가라, 들어가!”

한동안 앱(애플리케이션) 게임에 빠져 있을 때 남편이 내게 하던 말이었다. 아이들이 휴대폰을 끼고 산다거나 게임에 빠져 정신 못 차린다는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게임은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월급이 하루 만에 사라져 버리는 통장, 매일 같이 쌓이는 설거지 거리나 빨랫감, 내 맘 같지 않은 인간관계의 피곤함 따위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빠른 손놀림만으로 게임머니가 쌓였고, 레벨을 클리어하고 나면 언제나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며 어떤 누구도 내게 잔소리하지 않았다.

그런 세상이 현실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깊이, 오래 빠져 있는 건 위험했다. 새 학기를 맞으면서 학점 신청을 지난 학기보다 많이 했다. 그리고 폰에서 게임 앱을 삭제했다

불혹을 넘겨서인지 게임의 유혹에 흔들리진 않았다. 흔들릴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내서인지도 모르겠다. 1년 후엔 졸업도 해야 했고, 졸업하기 전까지 생각해 뒀던 드라마 습작 완성하겠다는 욕심도 있었기에 몸보다 마음이 더 바빴다.

드라마의 트렌드 살펴봐야 했기에 드문드문 인기 있는 작품을 챙겨 볼 시간도 필요했다. 한동안 영화만 출연하던 현빈이 모처럼 드라마 주연을 맡았다기에 검색해 보니 웬 게임이냐 별로라는 댓글이 있었다. 제목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기에 멜로드라마구나 했더니 아니었다.

 

2세대 벤처기업인으로 유명한 투자회사 대표 유진우(현빈) 한밤중에 전화 한 통을 받고 AR(가상 증강현실) 게임 투자하기 위해 그라나다로 날아간다.

유진우가 눈독을 들이는 AR 게임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VR 게임과 차원이 다르다. 일단 귀상어처럼 생긴 VR 헤드셋이 필요 없다. 대신 가상현실을 볼 수 있는 스마트렌즈를 사용한다. 드라마 설정상 유진우의 회사에서 발명한 건데, 곧 실제로 출시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현실적인 물건처럼 보인다. 렌즈를 끼고 눈을 꾹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 게임 로그인이 되고 그 이후는 유진우의 표현대로 마법이 시작된다.

게임은 그라나다의 한 광장에서 나사르 왕국의 전사와 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레벨이 올라가면 플레이어는 각종 칼, 총 등의 아이템을 획득한다. 싸우게 되는 대상은 과거 시대의 전사, 궁수 등에서 현대의 테러리스트, 저격수 등으로 바뀌게 된다. 물론 그들의 모습은 렌즈를 낀 유진우의 눈앞에만 나타난다. 게임 안에서는 녹슨 칼의 거친 감각이 느껴지고 전사가 휘두르는 칼에 맞으면 피가 뚝뚝 떨어진다. 로그아웃과 함께 모두 사라지긴 하지만, 날아오는 화살은 너무도 위협적이다.

라이벌인 친구 차형석과 결투를 벌인 유진우는 차형석을 죽이게 된다. 물론 게임 속에서. 문제는 차형석이 게임을 하던 장소에서 실제로 돌연사하고 이후 게임 중 오류인지 환각인지 죽은 친구의 모습 계속 보인다는 것이다. 더는 보지 않으려 렌즈를 빼고 로그아웃을 하지만, 차형석은 여전히 피투성이 무표정한 마지막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유저(게임 이용자)에서 NPC(몬스터나 상인, 스토리 진행 캐릭터 등 게임 이용자가 직접 조작하지 않는 캐릭터)변해 버린 것이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나타나는 차형석은 차좀비라는 별명을 얻었다.

PPL(특정 상품을 방송의 소도구로 이용하여 간접광고 효과를 얻는 것)이 너무 과하다, 개연성이 없다, 전개가 느리다 등 악플도 만만치 않지만, 드라마는 시청률 1위를 찍으며 잘 나가고 있다.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게임인지 현실인지 모를 판타지 세상 속에서 주인공 유진우는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치열하게 싸운다. 여기서 싸움이란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칼싸움, 총싸움이다. 거기에 드라마 중반부터는 여주인공 희주(박신혜) 달달한 로맨스까지 더해진다.

으악, (게임 속 특수 아이템)가 어떻게 된 거야?”

서 비서(주인공 유진우의 비서) 죽으면 안 돼. 살려 내.”

찬열이(드라마에서는 게임 제작자, 실제는 아이돌 그룹 엑소 멤버) 살았겠지?”

“623시간 기다려야 해.”

큰딸이 드라마가 끝날 때마다 거의 울부짖다시피 외치는 대사다.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종종 다른 생각에 빠졌다. 드라마 스터디를 하면서 우리끼리도 하고, 작법서에도 심심찮게 나오는 얘기 중에 이제 더 이상의 새로운 얘기는 없다는 말이 있다. 신데렐라, 로미오와 줄리엣, 귀신, 전생, 타임워프에 도깨비까지 나올 만한 소재는 다 나왔고 이야기는 거기서 거기라는 것. 그러나 관객(시청자)은 늘 새로운 것에 꽂히고 어떤 방법이든 새로운 것은 존재. 내가 매일 빠져 들어가 허우적대던 게임 속에도 새로움이 있었다. 물론 내가 했던 앱 게임과 AR 게임은 그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쓴 송재정 작가는 포켓몬 고라는 게임에서 이 드라마의 소재를 얻었다고 했다. 막내가 즐겨 보는 만화영화라 포켓몬은 알고 있었고 포켓몬 고라는 게임이 나왔다고 했을 때 , 대단하다. 재밌긴 하겠네.’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으로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어 낼 생각은 미처 못 했다.

모두가 아는 것, 당연하고 사소한 것을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고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은 그것을 접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TV를 보면서 다시 배우고 새긴다.

뭔가 한 포인트라도 새로운, 낯설게 보이는 드라마를 써 보고 싶다는 꿈도 몽글몽글 피워 본다. 이제 주름 자글거리며 늙어가는 게 낄낄거리며 드라마나 보면서 뭘 배우냐고 친정엄마는 하늘에서 혀를 차겠지만, 아직은 드라마에서 배우고 게임 속에 푹 빠지면서 남은 학창 시절을 즐겨 보련다. 나 같이 인문학적 소견이 얕은 사람도 아는 공자님 말씀, 지지자 불여호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호지자 불여락지자(好之者不如樂之者)를 외치며!

 

동인 수수밭길 제3호 수필집 <맑은 날, 슈룹>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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