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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랑이 커피    
글쓴이 : 김은희    12-05-14 20:14    조회 : 3,962
모스크바 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가장 아쉽고도 그리웠던 것이 자판기 커피였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 다시 가게 되었을 때 가장 반가웠던 것도 그 자판기 커피였다. 값도 거의 변하지 않은 ‘150원’이다. 우리 때는 ‘100원’이었는데, 내가 대학교 다닐 때와 십여 년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딸랑이 커피 값과 30~40만원하는 대학생 아르바이트비 같다. 등록금은 몇 배가 올랐더라...
자판기 커피를 애칭으로 ‘딸랑이 커피’라고 불렀다. 자판기 동전 투입구에 동전을 넣으면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딸랑’하고 나기 때문이다. 딸랑이 커피는 뭐니뭐니해도 도서관에서 마시는 것이 최고였다.
내가 다니던 대학 도서관은 5층 건물이었는데 층마다 분위기가 조금씩 달랐다. 1층은 도서 대여실, 2층은 정간실(정기간행물실), 3,4,5층은 열람실이었는데, 같은 열람실이라도 3, 4층은 칸막이가 되어 있고 제 1, 2, 3 실 등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더 학구적인 분위기였다. 5층은 전체가 확 트인 하나의 열람실로 되어 있는데다 칸막이가 없는 둥근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통유리라 창문에선 대학 경관을 다 둘러 볼 수 있어 ‘스카이라운지’라고 불렀다.
나는 주로 4층 열람실에서 공부했다. 3, 4층은 ‘죽돌이’(고시나 취업 준비로 하루 종일 앉아서 ‘죽치고’ 공부만 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수업 등으로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남의 자리를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전전하는 학생들인 ‘메뚜기’들도 적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았다.
층마다 자판기 커피 맛도 달랐는데, 4층 커피가 가장 맛있어서 3층이나 5층에 앉더라도 굳이 4층으로 가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보다 설탕과 크림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간 소위 ‘1:2:2의 자판기 황금비율’이 지켜지는 곳이었다.
발자크처럼 하루 15시간 작업하며 30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지는 않았지만 커피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졸리거나 기분을 환기시킬 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었다. 발자크가 <커피의 기쁨과 괴로움> 에서 “커피라는 것이 위에 들어가자마자 야단법석이 일어난다. 싸움터에 나선 대군의 각 부대처럼 생각들이 움직이며 전투가 벌어진다. 기억이 되살아나 질풍처럼 몰아친다. ‘비교’라는 경기병은 훌륭한 대형으로 전진하고, ‘논리’라는 포병은 서둘러 포와 포탄을 준비하며, ‘비평’은 저격수처럼 사격을 시작한다. 비유가 쏟아져 종이는 잉크로 뒤덮인다.”라고 묘사했듯이 커피는 우리의 지성을 깨워주고 다시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윤활유이자 각성제였다.
낯선 노어 단어를 찾아가며 거의 하루 종일 단어를 외고, 문장을 해석하고, 작품들을 읽으면서 도서관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던 내게 자판기 커피는 참 좋은 동반자였다. 공부하다가 지루해지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친구나 선배를 찾아 도서관 복도 끝이나 휴게실에서 너네 나네 할 것 없이 주머니 속 동전을 찾아 딸랑이 커피를 뽑아 들고 얘기꽃을 피웠다. 가끔 귤이나 고구마 등 간식거리라도 누군가 싸들고 나타나면 ‘도서관파’들을 불러 모아 간식모임을 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 대학생들, 특히 여대생들의 트렌드는 뚜껑 씌운 ‘브랜드 커피’ 종이컵을 든 모습이다. 난 습관적으로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데 학생들은 거의가 유명 커피 전문점의 일회용 커피 잔를 들고 수업에 들어온다. ‘그 커피가 그렇게 맛있냐’는 내 물음에 한 학생은 솔직히 점심은 굶더라도 커피는 4000원까지 하는 전문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유행’이고 ‘흐름’이라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커피가 유행이자 흐름이었던 적은 많았다. 발자크 못지않게 볼테르도 하루 50잔 이상의 커피를 마셨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커피 양으로 인해 그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볼테르는 83세까지 살았다. 베토벤도 커피 애호가였는데 커피 알갱이를 정확히 60알 세어 분쇄해 유리로 된 커피 추출기에서 만든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침식사였다. 바흐는 '커피 칸타타'를 작곡했다. 그 곡에서 커피 마시는 습관을 버리라고 말하는 아버지에 맞서서 딸은 “내가 원할 때마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자유를 약속하고 결혼생활에서 그것을 보장하지 않는 한, 어느 구혼자도 내 집에 올 필요가 없어요. (...) 아버지! 제가 하루에 세 번씩 내 작은 잔으로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저는 구워놓은 염소고기처럼 말라비틀어질 거예요. 커피는 천 번의 키스보다도 더 사랑스럽고 무스카트 포도주보다도 더 감미로와요.” 라고 노래한다. 커피 칸타타는 라이프치히 치머만의 커피점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된(1734~1735), 당시 커피를 좋아하던 세태를 아주 잘 나타낸 곡이다.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 2부에도 "다른 이유야 어쨌든 설탕과 진한 크림이 들어간 진짜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는 북군을 증오했다." 라고 여주인공의 ‘커피 사랑’을 풍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커피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시는 아마도 탈레랑으로 이름이 난, 나폴레옹의 정적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1754년~1838년)의 <커피 예찬>일 것이다.
커피의 본능은 유혹
진한 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나폴레옹도 그에 질세라 “내게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은 진한 커피, 아주 진한 커피이다. 커피는 내게 온기를 주고, 특이한 힘과 쾌락과 그리고 쾌락이 동반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현대엔 커피가 고급화 되는 추세여서 외국계 커피전문점과 한국의 커피전문점이 각축을 벌이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런데 커피전문점에서 3000~4000원하는 커피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미국산 원두 10g(1잔 분량)의 세전 수입 원가가 123원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브랜드 커피 맛이 참 씁쓸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다. 유명 호텔이나 고급 커피 전문점에 가면 한 잔에 25000~50000원까지 하는 ‘루왁’ 커피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루왁’ 커피는 인도네시아의 사향 고양이가 잘 익은 빨간 커피체리를 탁월한 감각으로 골라먹은 후 위에서 소화시키면서 과육을 제외한 씨 부분을 자연스레 발효시켜 배설한 씨다. 독특한 풍미와 향을 지닌 데다 워낙 소량이 생산되다보니 비싼 값에 팔린단다.
가끔은 나도 차 맛이 나는 깔끔한 원두커피가 마시고 싶어 전문점을 찾기도 하지만, 내 일상은 여전히 딸랑이 커피와 함께 한다. 전문점에서 파는 다양한 종류의 커피 맛을 섬세하게 구별할 수 있는 탁월한 미각을 소유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고, 하루에 몇 잔씩 마시게 되는 커피를 몇 천 원이나 하는 브랜드 커피로 즐길 형편이 안 되어서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트렌드’를 무시하고 여전히 추억 속 딸랑이 커피를 들고 강의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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