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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의 가마터(201909한국산문등단작)    
글쓴이 : 김숙    20-06-25 01:18    조회 : 5,263

내 마음의 가마터

                                                                                                                      김숙

 

   2019518, 나는 수필동아리 수수밭 MT에 가고 있었다. 운전을 덜 부담스러워하는 이 선생이 차를 몰았다. ‘꿈꾸는 뜰을 닉네임으로 쓰는 정 선생, 'SDU 전북 모임' 박 회장과 함께였다.

   직지사를 품고 있는 황악산 골짜기에 접어들었다. 불현듯 정년퇴임 날 밤과 이튿날 새벽 즈음에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어느 산속에 있는 도자기 가마터를 찾아갔던 꿈이었다. 그때처럼 산을 타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깊숙한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때의 기억과 흡사하였다.

 

   “우르릉 쾅쾅.”

   바로 머리 위에서 천지를 찢겠다는 듯 천둥소리가 요란하였다. 동이로 들이붓듯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201891일 퇴임 이튿날, 우레와 빗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곧 ! 꿈길이었네?’ 하고 느꼈다. 꼭두새벽의 타성에 젖었던 몸은 늦잠이 무색하여 푸드덕 소스라쳤다. 오랜 세월 걸어왔던 길을 잃은 아침이었다.

 

   희붐한 창밖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꿈속에 찾아갔던 길을 되짚어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독립군이었다. 아니 이름 없는 의병이었다. 험준한 바위산을 타고 있었다. 중국 장가계의 어느 협곡 같기도 했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마추픽추의 고산 길 같기도 했다. 네발로 기듯 넘어갔다. 아슴푸레한 기억 속에는 두어 명의 동지도 함께였다.

   다다른 곳은 어느 도자기 가마터였다. 속내로는 의병들의 본 거지였다. 그곳에는 천민과 백정, 양반도 있는 것 같았고 농민을 비롯한 갖바치도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역사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프레임 속에 내가 있었다.

   가마터 주인은 조선 최고의 도공이라 하였고 의병 대장이기도 하였다. 그는 나에게 팥죽이 그득한 가마솥을 안겨주었다. 나의 임무는 동지들에게 팥죽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새알심이 동실동실 떠다니는 팥죽을 오지그릇에, 쭈그러진 양재기, 이 빠진 사기그릇에 덜어주었다. 팔도에서 뜻을 모은 의병이 제각각이듯 담는 그릇도 각양각색이었다.

 

   한참 팥죽을 나누고 있었는데 우르릉 쾅쾅.”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적군의 침략인지 토벌군의 작전인지 모를 일이었다. 대포 쏘는 소리 같이 무시무시하였다. 우리 동지들의 무기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총칼이 다였는데 ! 경각의 시점은 이렇게 오고야 마는가?’, ‘저 정도 굉음의 신무기라면 이젠 우리 모두 죽겠구나.’ 고뇌하며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다 눈이 번쩍 띄었다. 그것의 진원은 천둥소리였다. 개꿈이었다. 얼토당토않고 허무맹랑하기 그지없었다. 독립군 아니, 의병이라니 감히 가당치도 않았다.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우리는 합평 시작 전에 직지사 경내를 후딱후딱 돌아보기로 하였다. 자주 오기 어려운 곳이니 아쉬운 마음을 그렇게라도 위안 삼아 볼 요량이었다.

   사천왕상 앞에서 서툰 합장을 하고 묵례를 올렸다. 대자연 속에 잠시라도 머물 수 있게 된 감사 인사를 수문장께라도 아뢰는 마음이었다. 소나무 향기가 연무처럼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그 아래를 걷기만 하여도 산속의 좋은 기운이 다가왔다.

   절집 마당에는 초파일에 달았던 연등이 누군가의 간절함을 경건하게 발원하는 듯하였다. 전각 아래는 모란꽃 진 자리를 뒤로 진분홍 작약꽃 또한 이울고 있었다. 어느 모퉁이에는 하얀 설토화가 피었다가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의 별들이 떨어져 땅 위에 은하수를 흐르게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대웅전 모서리 문에서 건성으로 합장하고 슬쩍 지나쳤다. 옥동자를 점지한다는 비로전 나신의 동자상을 확인하고 길을 내려왔다.

 

   모임 장소로 오던 길에 백수 문학관에 들렀다. 시조 문학의 큰 산맥인 백수(白水) 정완영(鄭椀永)의 문학관이었다. 때마침 문학관 앞뜰에서는 음악회가 열렸다. 시인 탄신 100주년 기념 감꽃 음악회였다. 우리가 뜰을 지나 문학관으로 들어갈 때는 가야금 합주가 끝나고 오카리나 독주가 연주되고 있었다. 비 내리는 산골짜기에 오카리나 소리가 멀고 가깝게, 깊고 얕게 풀빛인 듯 산빛인 양 스며들고 있었다. 흙으로 구워 만든 악기의 선율이어서 자연과 괴리감이 없는 것일까? 그 가락에 얹어 백수의 시를 읊조려보니 그대로 노래가 되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보는 이도 없는 날에/ 푸른 산 뻐꾸기 울고, 감꽃 하나 떨어진다/ 감꽃만 떨어져 누워도 온 세상은 환! 하다.// 울고 있는 뻐꾸기에게, 떨어져 누운 감꽃에게/ 이 세상 한복판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여기가 그 자리라며, 감꽃 둘레 환! 하다.” (정완영, <감꽃>)

 

   드디어 수수밭 MT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민박집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내가 퇴임하던 날 밤 꾸었던 꿈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의 어렴풋한 분위기가 이곳과 겹쳤다. 꿈속에서 흙으로 빚는 도자기 터를 찾아갔다면 이곳은 마음을 빚어 구워내는 가마터에 온 것 같았다. 꿈속에 의병대장이 있었다면 여기는 추상秋霜 같은 교수님이 있었다. 교수님에게는 양미간을 중심으로 상서로운 백호의 기상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유의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을 활보하는 콘도르의 위용이 있었다. 그 시선 안에 천 명의 도공, 만 명의 문사라도 품을 수 있는 너끈함이 고여 있었다.

 

   무엇보다 꿈속에 뜻을 같이했던 동지들처럼 이곳은 크고 작은 문사들이 집결하여 있었다. 취향을 공유하고 창작을 통해 성장해 가는 장인들이 있었다. 질 좋은 도자기를 구워내듯 자신의 글을 통해 삶을 완성해 가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각자의 글을 빚고 다듬기도 하지만 합평을 통하여 글에 대한 의견을 내고 공감하기도 하였다. 서로 돕는 선후배들이 나눔과 소통으로 숨 쉬는 공간이었다.

   먼저 되었다고 자랑하거나 으스대지 않았다. 처음 시작하는 신입 회원에게도 기꺼이 품 넓게 마음을 열어주는 사람들의 집합체였다. 덕분에 오프라인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나도 이 가마터의 일원이 된 것 같았다.

 

   궂고 힘든 일에 너와 내가 없었다. 30여 명이 넘는 식사를 챙기는 일에 솔선하였다. 음식을 나르고 상을 차리며 불을 피우는데 누구도 미적거림이 없었다. 질 좋은 쌀로 구수한 밥을 지었다. 슴슴하게 끓인 배추된장국이 정겨웠다. 귀하디귀한 두릅 전이 나오고 홍어 전이 차려졌다. 언젠가 다시 먹어보고 싶었던 방아 잎 장떡 전도 마련되었다. 홍어가 삭힌 맛이 있다면 방아 잎은 다시 먹어보아도 묘한 향이 매력적인 식자재이다.

   강원도에서 데리고 온 오미자 막걸리에 부안에서 날라 온 뽕 주 한잔의 나눔이 분위기를 한껏 돋웠다. 모름지기 사람의 향기가 나는 가마터였다.

   꿈속에서 나는 동지들에게 팥죽을 열심히 나눴었는데 이곳에서는 차려 준 밥상만 과분하게 받았다. 음식을 준비하고 수고한 손길들을 위하여 고마움의 건배 제의를 하고 싶었다.

 

   밤늦도록 가마터는 불타올랐다. 새로 등단한 작가에게는 축하의 시간을 기획하였다.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전달식도 있었다. 각자의 의견을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시간도 의미 있었다. 내 순서가 되었을 때 나는 신입의 어눌함으로 떨거나 중언부언하였다.

   어느 선배가 자기의 글쓰기는 반성문에서 비롯되었다 하였다. 결론은 선생님도 교도관도 반성문을 읽지 않는 것 같더라.”였다.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교수님의 구상 시인과의 인연 이야기와 역사 이야기, 문학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살아있는 증언 그 자체였다.

 

   우리 일행은 미리 약속한 새벽 한 시에 길을 나섰다. 황악산 어디쯤에서 소쩍새 소리가 들렸다. “딸꾹, 딸꾹, 딸꾹, 딸꾹.” 비로전 나신의 동자승이 잠시 소쩍새의 몸을 빌렸을까? 점지해 준다는 옥동자 대신 수수밭 동아리를 마음의 가마터로 안겨주겠다고 속삭여 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공감과 감사, 소박한 꿈을 나누며 고라니가 출몰하는 늦은 밤길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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