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다닐 무렵 집에 오는 손님들은 항상 예쁘고 얌전한 동생에게만 칭찬을 하고 관심을 집중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요것도 밉상은 아니여!”하시면서 나를 치마폭에 감싸 안으셨다. 똑같은 원피스를 입어도 몸매도 안 살고 퉁퉁 발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는 나보다 인형 같은 얼굴에 노래도 잘 하고 착한 데다 귀여움이 뚝뚝 흐르는 동생이 예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후에 동생들을 호령하여 규율을 잡아 공부시키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장녀로서 내 입지를 굳혔고 이젠 할머니의 말씀대로 밉상만 아니어도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세상에 내 것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질적인 소유로 성공을 가늠하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변명이 아닌 진정한 ‘마음의 가난’을 배운 것은 나이 50이 준 커다란 선물이다. 온갖 좋은 것은 다 내 것으로 하고 싶은 욕심과 내 것이 될 것만 같은 세상의 집요한 유혹에 휘둘려 펄펄 끓는 죽솥마냥 바글대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진 것이다.
내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우리 집 화단에 심겨진 나무 한 그루, 내 방 화병에 꽂힌 꽃 한 송이도 내 것이 아니요, 그게 어디에 있든 바라보며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즐길 수 있다면 그 존재 자체로서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내 것인 냥 마음대로 하고 싶어 안달하던 자식과 남편까지도...
무엇을 보든 보이는 것을 전부라고 믿는 어리석음도 털어내고자 한다. 내가 보는 극히 일부분을 전체라고 믿었던 지난 날, 너무나 많은 일들에 속고 실망해 왔지 않은가? 내게 좋기만 한 사람, 어쩐지 싫은 사람도 빙산 아래 감춰진 숨은 얼굴을 가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 좋은 사람에게 끌리는 거부할 수 없는 홀림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도 싹을 자르기보단 그가 가진 더 많은 모습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내 좁쌀 만한 지식과 소견으로 무엇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우를 범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결혼은 도박이라고 흔히 말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결합을 비하하는 듯한 그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주 작은 부분을 그 사람의 전체라고 착각하거나, 상상했던 것이 들어맞고 안 맞고에 따라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도박이라기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지(知)’가 더 맞는 말이지 싶다. 배우자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결혼은 서로를 끊임없이 알아 가고 상대방과 맞추어 가는 여정이라고 설명하겠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Pareto)는 개미를 자세히 관찰하던 중에 20%의 개미들만이 열심히 일하고 80%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을 인간의 활동에도 적용시켜 2080의 법칙을 제창했는데 여러 분야에서 증명된다고 한다. 세계인구의 20%가 80%의 돈을 가지고 있다, 20%의 근로자가 80%의 일을 하고 있다, 백화점의 20% 고객이 80%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등 어떤 일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20%에 대한 연구다. 나는 20에 속해야 했고 아들도 당연히 20에 들여보내야 한다고 열을 올렸었다. 하지만 이제는 80이 없다면 20도 의미가 없고 20안에는 또 다른 2080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성경 <레위기>에서는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禧年)이라 했다. 이 해에는 노예들은 해방시켜 자유를 주고 가족에게 돌아가게 했으며 빚도 탕감해 주었다. 땅을 가졌던 사람들도 경작권을 내놓고 농사도 짓지 않았다. 이는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 계속되지 않게 하려는 안전장치였고 50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자는 희망을 주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한 자유의지를 박탈당해 억눌린 사람들에게 희년은 새로운 탄생의 해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50은 참으로 의미 있고 중요한 숫자임이 분명하다.
지난주에는 마당에 심을 꽃을 사러 갔다. 작년엔 양귀비를 심었는데 아주 작은 바람에도 하늘거리는 황홀하게 예쁜 꽃과는 달리 잎이 어찌나 억세고 드세게 자라는지 실망스러워 올해는 다른 꽃을 찾았다. 화원 주인은 색깔도 예쁘고 오래가는데다 월동이 되어 내년에도 꽃이 필거라며 미니장미를 권했다. 월동된다는 말에 솔깃해서 해마다 몇 차례씩 꽃을 심는 수고를 덜어볼 요량으로 다른 꽃보다 비쌌지만 미니장미 한 판을 사다 심었다. 심은 지 일주일이 지나자 온실에서 나온 이 녀석들은 햇빛에 데어 아주 추하게 변해 몸살을 앓고 있다. 빨간 꽃은 죽은 핏빛이고 노란 꽃은 썩은 계란 색깔이 되어버렸고 꽃잎은 장마철 땡감 빠지듯 힘없이 떨어진다. 당장 다 뽑아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일거삼득(一擧三得)을 바란 내 과한 욕심을 경계한다. 인내하며 이 녀석들이 적응하여 예쁜 꽃을 피울 때를 기다려줘야 한다.
갈등은 곧 욕심이다. 나는 너무나 자주 이럴까 저럴까, 할까 말까, 갈까 말까를 두고 갈등해 왔다. 그럴 때마다 포기하고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내 생각만 하며 욕심 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속을 끓이다보면 하늘 한 번 쳐다볼 여가가 없었다. 이제 마음에 갈등이 일면 욕심 부리고 있다는 신호겠거니 생각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냉정히 되짚어 보고 갈등이 없는 쪽으로 결정하는 습관이 생겨났다. 놀랍게도 그런 결정들은 나를 오히려 더 행복하게 했고 내가 꽤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뿌듯함을 가져다주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간결하게 살아가는 것이 주는 상쾌함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물론 나는 아직도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라는 황금률과 내게 한 대로 갚아주고 싶은 탈리온(talionis)의 법칙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에 불만하지 않으며, 주어진 삶에 순응하고 감사한다. 나는 영원히 내 것이 아닐 가진 것을 더 나눌 수 있게 될 것이고,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을 더 많이 사랑할 것이다. 비록 내일 또 유혹에 빠져 허우적댈지라도 그런 나 자신을, 내 쉰 살의 개똥철학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