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그리고 을
박영화(2018.3 등단작)
“남편은 직업이 뭔데요?”
“......”
시간이 정지된 듯 고요하던 시절이었다. 아직은 서울이 그립지도, 이곳의 삶이 버겁지도 않았다. 미드(미국 드라마)를 도구로 삼은 덕분에 작은 식당 캐셔라도 부딪쳐 볼 만 했다. 새롭고 낯선 상황에서 대한민국 아줌마 정신은 강력한 무기가 되는가 보다. 집에서 가까운 한인 식당에 시간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주인 여자는 기껏해야 나와 동년배쯤 보였다. 일가붙이 하나 없는 미국 생활의 시작이었고 더는 리처드 기어 닮은 청소부와 마주치는 것도 신기하지 않았다. 야금야금 줄어드는 통장잔고는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시애틀에 언제 오셨나요?” 사장은 이곳에 온 시기를 비롯해 한국에서의 경력과 서울집의 위치까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과 말본새는 흔한 동네 식당아줌마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너 쉽지 않을 걸?’하며 비웃는 것 같았다. 겨울문턱임에도 당황한 나머지 온몸에 무거운 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혀는 점점 굳어가는 것만 같았다. 몸 속 장기들 틈 어딘가에 숨어 있던 자존심은 가만히 그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사정없이 벌떡거리는 가슴을 들키지 않으려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었다. ‘서러운 타향살이의 시작이구나, 겨우 작은 식당 면접인데.’
“저기요, 여기서 반나절 일하는데, 남편 직업을 왜 묻는 거죠? 무슨 대기업도 아니면서.” 나도 모르게 볼멘 한마디가 튀어 나왔다. 눈앞의 사물들이 검은 도화지처럼 무심하고 막막하게 느껴졌다. 나는 엉덩이로 힘껏 의자를 밀어젖히곤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다.
내가 태어나 살았던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자신조차 몰랐던 한국인의 피를 더욱 진하게 만드는 듯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한인상점에 드나들었고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인사라도 할양으로 머뭇거렸다. 매일 아침 아이들 등굣길에 마주치는 중국인 할머니조차 우리네 시골마을의 어르신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찾아간 것인데,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던가. 평온했던 머릿속은 온통 거미줄처럼 엉겨 붙어 두통이 몰려왔다. 나는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어느 쇼핑몰 주차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그 후로도 얼마동안 나의 ‘엉덩이로 시끄럽게 의자 밀기’는 계속되었다. 지구상에 아줌마만큼 적응력이 뛰어난 종족은 없다고 했던가. 못 말리는 한국 엄마의 특질과 절박한 현실이 나를 강한 생활인으로 성장시켰고 언어능력은 더도 덜도 아닌, 식당 운영에 적합하도록 최적화되어갔다.
“굿모닝, 아줌마!”
“굿모닝, 태호!”
몇 년 후, 제법 목 좋은 곳에 첫 식당을 개업하게 되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친구 태호에게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본명은 ‘테오도르 이즈마엘’ 이지만, 그냥 태호라고 불렀다. 그는 멕시코 가난한 산속 마을에서 아홉 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태호는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했고 여덟 살 이후 돈 벌이가 되는 곳을 떠돌며 살았다. 무능한 정부와 무기력한 부모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십대 후반, 미국으로 목숨 건 탈출을 감행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 둘은 비슷한 시기에 시애틀에 왔고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경력을 쌓았다. 직장동료로 만나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줄 정도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그는 한국사람 이라는 나의 근본에 불신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전에 태호가 일했던 식당 주인은 영어가 서투른 그에게 걸핏하면 한국말로 욕설을 퍼부었다. 게다가 임금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그가 만났던 다수의 주인은 과격하고 권위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말 수가 적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은 내게도 인내가 필요했다. 우리는 비슷한 면이 많았다. 배고픈 어린 시절, 배움에 대한 열망, 생에 대한 긍정성 등. 무엇보다 도저히 바꿀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삶에 도전하여 이곳까지 온 것이다.
“너와 나는 같은 입장이야. 비주류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너는 을이 아니고 나도 갑이 아니야.”
나는 그가 내 진심을 알아주길 바랐다. 사실, 태호가 한인들에게 받은 모멸감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나 역시 타국에서 마주한 동포들에게 적잖은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갓 이민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독 중남미 이주자들에게 함부로 행동했다.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이 나라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소수민족이 다른 마이너를 상대로 ‘갑’질을 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만났던 한인 대부분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올바른 분들이다. 그러나 일부는 가끔 나 자신이 한국인임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태호, 땡큐 포 유어 올 카인드니스.”
갑작스런 나의 귀국 결정으로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수년 동안 함께 일터에서 일구었던 나날들이 수채화가 되어 떠올랐다. 나는 그가 한 번도 가볼 수 없었던 근사한 식당에서 특별한 요리를 대접해 주고 싶었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네가 없었으면 우리 애들 대학도 보내지 못했을 거야.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더 행복해지길 기도할께.”
나는 진심어린 감사의 말과 보너스가 든 봉투를 건넸다. 그는 아줌마 같은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다며 아쉬움에 눈물을 훔쳤다. 서로 기약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 언젠간 꼭 만나자고 약속했다. 태호는 나에게 타지에서 운명처럼 만났던 든든한 아들이자 속 깊은 벗 같은 존재였다. 아줌마가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다며, 미역국에 흰밥을 듬뿍 말아서 먹던 모습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태호가 사진 한 장을 메일로 보내왔다. 아빠를 꼭 닮은 작은 공주님이다. 참한 색시와 보석 같은 딸내미까지. 그가 꿈꿔왔던 그림 같은 행복한 삶이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