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1987’
박영화
“여보, 주말인데 영화 한 편 볼까?”
“그럴까?”
민주주의 항쟁을 영화로 제작했던 기업이 권력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때와 다르게, 그 역사의 재현을 대통령 내외가 먼저 관람하는 시대가 되었다.
영화는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군 사망사건과 연세 대학생 이한열의 죽음을 다룬 내용이다. 1987년. 나는 인생이란 긴 항로의 어느 지점에 있었을까. 밤늦은 시간이라 관객은 삼십여 명이 채 안되었다. 두 시간의 러닝 타임은 결코 길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자막 한 줄이 사라질 때까지 일어서지 못했다. 뒤편 좌석에서 소란스러운 남자들의 음성이 자리를 뜨는 이들 주위에 맴돌았다. 그들은 스크린 속에 주검이 된 청년과 비슷한 연령이었다. 젊음이라는 당당한 옷을 걸친 그들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1986년. 여고 3학년 시절. 당시는 고교 등락을 결정하는 연합고사를 치르고 지역 학군에 추첨으로 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명문고(풍문여고)에 들어갔다며 자랑스러워하셨다. 학교는 종로구 안국동 초입이었고 우리 교실은 중앙 건물 2층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총명하다며 기대가 컸지만 애초부터 나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뒷자리에 앉아 친구들과 속닥거리며 쪽지를 주고받는 재미에 결석은 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도 특이한 재주가 있었는데, 그것은 각종 냄새에 민감한 알레르기 체질인 것이다. 매일 2교시가 시작될 무렵이면, “에취 이!”하고 콧구멍 속의 털들이 신호를 보냈고 친구들은 내 덕분에 곧 몰아쳐올 최루탄 가스에 대비해 마스크와 수건을 꺼냈다.
명륜동 성균관대에서 시작된 매운 공기는 창덕궁을 지나 안국동까지 날아와 온 학교를 뒤덮었다. 벌건 눈과 코를 비비면서도 변화를 외치는 운동권 대학생의 열정적인 모습에 가슴 언저리가 뜨겁기도 했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들과 나란히 진격할 기회가 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입시에 실패한 나는 단과학원 주변을 배회하는 재수생이 되었다. 광장에서 정의를 노래하는 것은 나 같은 대학 실패자에겐 그 자격조차 없는 듯했다. 그저 또래의 함성을 신문기사로 엿보기만 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며 ‘불의에 맞선 용기 있는 저항’이라 여겨지기도 했지만, ‘학생이 공부나 하지’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어른들의 무관심에 슬쩍 편승한 외면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평범한 젊은이가 되었고 여유 없는 현실 속에서 침묵하는 어른으로 살아남았다.
“애들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 것을···.”
영화관을 나오며 남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열기가 뜨거웠던 그 시절에 남편은 의정부 근처 부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 중이었다. 흔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밤바람 사이로 퍼져 나갔다. 매일 드나드는 골목을 지나다 똑같은 돌부리에 걸렸을 때처럼 기분이 황당하면서도 먹먹했다.
달라진 세상에서 현대사의 아픔은 이젠 일부의 관심사만이 아니다. 가슴 한쪽이 따끔거렸다. 90년대 태어나, 전쟁과 저항을 디지털 게임 속에서만 경험하고 자라온 내 아이들에게 30년 전 청춘의 외침과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힘없이 늘어진 중년이 되었건만, 영화 속 두 열사는 영원히 이십대로 남았다. 어디 그뿐인가. 역사의 현장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던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 가스총을 겨냥했던 전투경찰도 이 나라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어느 산골마을 농부의 아들이었으며, 우리들의 친구였다. 격동의 시대는 두 진영의 아들들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갈라놓았고, 서로 다른 오해와 고통을 감내하게 만들었다. 또한 당시 권위주의적 사회분위기는 나처럼 여린 스무 살이 무모한 용기를 내기 쉽지 않았다. 바로 앞의 삶을 견디기에도 버거운 또 하나의 처량한 젊음이었다.
두 딸은 지금 이십 대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 핑크 빛 사랑을 꿈꾸며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은 좋은 나이이다. 실패는 실패일 뿐이라고 가볍게 잊어버릴 수 있는 시절이기도 하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지금 우리들의 안정된 삶과 보장된 권리는 수많은 현장에서 청초한 젊음을 포기해야 했던 그들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두려웠으나 외면하지 않고, 정의와 양심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십 대가 있어서였다고. 그러나 나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것 밖에는.
2018. 6 한국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