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랙스(Relax)
“아빠, 제가 쓴 글인데 좀 봐주세요.”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이 서재에 있는 컴퓨터 화면에 글을 띄우며 말했다. 전국 규모의 독후감 대회에 제출할 글이라고 한다. 전에는 자기가 쓴 글을 좀 보려하면 감추기에 급급했던 녀석이다. 그런데 내가 어느 수필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후, 아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달라졌다. 역시 상은 타고 볼 일이다. 아들의 부탁에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들이 본 책은 현대자동차의 성장을 이끌었던 엔지니어 이현순 사장의 회고록이었다. 아들은 저자의 성공신화를 나름대로 분석해서 자기의 견해를 밝혀놓았다. 글 자체는 구성이나 내용면에서 모두 괜찮았다. 그런데 자기의 느낌을 과장해서 표현하거나, 강조하고 싶은 내용을 반복해서 쓰고 있었다. 이것도 부전자전인가. 그 나이 때의 내 글을 읽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아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했다.
“힘을 조금만 빼면 훨씬 좋은 글이 될 거야.”
‘힘을 빼라’
말이 쉽지, 사실 이것 보다 어려운 게 없다. 골프를 칠 때나, 악기를 연주할 때, 혹은 다른 무언가를 할 때 누구나 느낀다. 힘 빼기의 어려움. 자기는 잘하려고 용을 써보지만 그럴수록 뭔가 어긋난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레슨 선생으로부터 들려오는 말이 있다.
“몸에 힘을 좀 빼세요.”
그 말을 듣고 이제부터 힘을 빼자고 의식하는 순간, 그 때문에 또 힘이 들어간다. 결국 상당히 숙련돼야만 몸에 힘이 빠지고, 한 단계 도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나는 살아오면서 몸에 힘을 빼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학창시절에는 의대에 들어가기 위해, 의대에 다니면서는 좋은 성적을 받고 다음 학년으로 진급하기 위해, 전공의 때는 혹독한 수련 과정을 견디기 위해…. 내 삶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전문의가 되고 이제 한시름 놓았다 싶더니, 조그만 의원을 개원하면서 의업과 생업이라는 갈등 속에서 나는 또 다른 긴장을 해야 했다.
삶의 긴장은 내 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내 목과 어깨 근육은 뭉쳐갔고, 나는 경추질환자가 되었다. 하루는 목과 어깨 통증 때문에 전신 마사지 숍을 찾았다. 마사지사는 50대 여인이었다. 의사인 내가 봐도 인체 골격에 대해 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신뢰가 갔다. 마사지는 받고 나면 개운해지지만, 받는 동안에는 적지 않은 고통이 따른다. 아마 통증을 참느라고 내 몸이 경직됐던 모양이다.
“몸에 힘을 좀 빼세요. 선생님처럼 릴랙스(Relax) 못 하는 분은 처음이에요.”
그렇다. 요즈음 나는 휴식을 취할 때도 릴랙스가 잘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졌고 숙면의 달콤함을 느껴본지 오래다. 이제 틈만 나면 하는 스트레칭은 나의 주요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어쩌다 몸과 마음이 릴랙스되어 숙면한 날은 날아갈 듯 상쾌하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나는 TV 채널을 돌리다 이 프로그램을 발견하면 채널고정을 하곤 한다. 처음에는 그들을 경외의 눈으로 보았다. 인생의 패배자라고 낙인찍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회를 시청하면서 차츰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개 두 부류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어서, 혹은 그로 인해 병을 얻어서, 자포자기하며 자연을 택했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모든 기계 문명의 혜택을 버리고,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하면서까지 그들이 원한 것은 몸과 마음의 릴랙스이다.
행복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의 릴랙스가 그 시작이 아닐까한다.
<월간에세이 202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