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대의 진실
오길순
양평을 통과할 때는 상고대도 작별을 고했다. 원주를 지날 때까지 그토록 아름답던 산맥도 앙상해졌다. 알알이 튕겨 나올 듯, 수정처럼 투명하던 고드름도, 신선들이 몰려나와 노래 부를 것 같은 신선도도, 상고대와 함께 녹아버렸다. 거대 빙하도 한 순간에 사라진다더니 정동진부터 빛나던 상고대산맥은 허상에 불과했다. 달빛매화신선도처럼 신비롭던 태백산맥 그림이 꿈결처럼 지워져버렸다.
<<엄마를 부탁해>>도 그러하리라. 갑옷 같은 공작새깃털을 털어내면 갈가마귀의 본 모습이 나올 것이다. 이카루스 날개처럼 드러날 민낯, 만고에 변하지 않을 본모습일 것이다.
구약성서 <욥기>의 주인공 욥은 ‘그 추잡한 죄를 짓고도 어떻게 하늘의 심판을 받지 않으랴!’ 외쳤다. 그렇다. 상고대가 녹으니 나목만 남았다. 태양처럼 영원히 빛날 표절의 진실일 것이다.
법정에 대신 갔던 김기자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우려가 사실인가? 판결시각인 2시 20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더욱 불안해졌다. 가랑비가 정동진 일출도 가리더니 진실의 태양도 먹구름에 가려졌나 싶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전화를 들었다. 김기자는 화 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 사람들 아닌가요? 그 많은 증거를 보고도 모를까요?”
그의 울분이 당연했다. 그 동안 승리를 확신하던 분들의 힘으로 나 역시 절망도 견뎌왔다. 허무로 너부러진 두 눈을 감았다. 그토록 아름답던 산맥도 갈가마귀의 민낯 같아서 더 이상 내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죠? 언젠가는 세상이 다 알겠죠?”
내 힘없는 대답만을 그에게 들려주는 게 미안했다. 왜 피해자는 끝없이 힘겨워해야 하는가?
2018년 12월 6일, 2시 20분, 신경숙 표절사건 2심도 1심처럼 판관은 가해자 손을 들어주었다. 70작품 가까운 오길순 수필로 <<엄마를 부탁해>>를 완성하고도 당당히 승리의 완장까지 찼다. 힘이 정의라는 말 이럴 때 쓰는 말 같았다. 백성의 전 재산을 착취하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폭군의 표정이 그러할 것 같았다.
‘오길순 패소’라는 판결내용이 순식간에 인터넷을 채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도배할 태세였다. 인권이란 말이 있었던가? 민중의 지팡이라 여겼던 언론이 인권 유린의 선봉장처럼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패소를 퍼뜨리는 언론이 하이에나처럼 여겨졌다.
지난 날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태양을 가린 오판에 억울했을까? 죽음으로까지 부르짖었을 독립운동사처럼 나 역시 문학사의 독립운동을 부르짖고 싶었다. 이 한 몸 진실의 비문을 세울 수 있다면 저 산맥 속에 몸을 던지고도 싶었다. 하늘이 하얀 종이였다면 2018년 12월 6일 2시20분은 검은 만장이 먹구름처럼 하늘을 덮었을지도 모른다.
변호사는 내내 애석해했다. 내 맘을 잘도 아는 그에게 눈물을 보일 뻔했다. 그는 “법의 판결이 진리가 아니다”, “법이 꼭 정의가 아니다”며 독백처럼 위안해 주었다. 20년 판관경력인 그도 이해가 되지 않는 판결인가 보았다. 판관의 적반하장 판결 앞에서 정의와 진리가 영원하다는 나의 신념은 산산이 무너져 버렸다.
진실을 찾는 일은 대양을 돛단배로 횡단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거대함정의 무차별 역류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포경선과 맞선 고래처럼 역부족이었다. 역류에 저항하는 것조차 죄가 될까봐 새가슴처럼 떨어야 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돛단배들이 침몰했을 것인가? 얼마나 많은 고래들이 죄 없이 눈을 감았을 것인가? 진실을 무너뜨린 이 거대 탁류를 누가 정화할 것인가?
법정에 문학을 맡긴 것이 실수였다고들 한다. 문학적 다툼을 법정에 해결해 달라는 것이 실책이었다고도 말한다. 하늘을 철석같이 믿은 욥을 판관은 벼랑으로 훅! 밀어버린 건 아닌가?
문예창작 2020년 가을호 통권 제1호(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