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르르, 짜르르
박영화
동료 수필가 박 모 씨는 걸핏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열아홉 순정으로 돌아간다. 봄꽃 휘날리는 오월이라 그런가 했는데 가만 보니 사시사철이다. 사랑스러운 매력 덕분일까. 가끔 뭇 남성으로부터 찌르르한 전기신호도 받는 모양이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싱숭생숭 너울대는 그 마음을 어찌 달랬을까. 아무래도 그녀의 여성 호르몬은 나보다 두 배는 되는 듯하다. 수줍게 고개를 내민 그 감성이 내 것 인양 반가운 것은 조금씩 말라가는 여성성에 대한 서글픔 때문이리라. 내게도 달콤 짜르르한 경험이 있긴 있었는데 말이다.
단발머리 시절, 조용필 오빠 때문에 어린 심장은 조용한 날이 없었다. 매일 밤 라디오를 품고 “오빠아아아”를 불러대느라 초당 심박수는 백 미터 달리기할 때처럼 요동쳤다. 밤새도록 절절한 노래를 들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도 흘렸다. 현실성 제로인 소녀의 짝사랑은 사춘기 내내 이어졌고, 사회 초년 시절 남편을 만나 울트라 초강력 화력을 발산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변화무쌍한 제도 속에서 불꽃은 사라져갔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밤처럼 나의 고독은 깊고 어두워졌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그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건 미국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누군가를 의식하는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생각보다 강하게 정신을 마비시켰다.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더니 머릿속엔 오색빛깔 상상화가 날아다녔다. 이국에서 잠깐의 일탈이었을까. 아니면 감춰두었던 무의식의 발악이었을까. 자신의 돌발적인 도발에 나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G는 영어 선생님이었다.
두 딸과 함께 시애틀로 이주하면서 한인교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남편은 사업 정리차 한국에 남아 있었다. 길 설고 사람 설고 언어조차 통하지 않은 상황에서 긴장의 연속이었다. 일터와 학교 외에는 가능한 집 밖을 나가지 않았기에 아이들의 사회성이 염려되었다.
첫 수업에 참석한 날 G가 평범한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브루스 윌리스 같은 경찰을 만나기도 하고 쇼핑센터에서 디카프리오 같은 훈남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들과 달랐다. 아니 달라 보였다. G는 유명 백화점 수석 디자이너로 업무가 바쁜데도 ESL 교사로 봉사를 하고 있었다. 중년의 싱글인 그는 동양 문화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나는 공짜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보답으로 한국 역사를 알려주었다. 또한 일주일에 두 번 예배는 물론 회화 공부도 빠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새로운 환경에 어리둥절한 두 딸에게 말을 걸어주는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길 잃은 여행지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G에게는 몇 달 후면 돌아올 약혼자가 있었고, 내게도 곧 들이닥칠 한 남자가 있으니 판타스틱 러브스토리는 판타지일 뿐이었다. 그저 교회 멤버로서 친절을 베푼 것이 객관적 사실이었지만, 왜 그런지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미지근하나마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시절 우리 부부관계는 올 풀린 바지 단처럼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그로 인해 외간 남자의 매너와 관심을 구분할 만큼 나는 온전치 못했다.
“더는 이렇게 못 살아. 끝내!”
장남의 짝으로 미덥지 않은 며느리 취급도, IMF로 시들어진 남편의 사업 문제까지도 전부 다 무뎌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제때 치유하지 못한 상처들은 미세한 흉터를 남겼고 그것들은 얇은 피부 안쪽에 자리 잡아 딱딱한 고름 덩이가 되었다.
뜨겁게 서로를 갈망했던 우리는 더 뜨겁게 달궈진 불 대포를 쏘아대며 전투를 벌였다. 불에 덴 상처를 마주 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선전포고를 단행했지만, 결국 기약 없는 적대적 공존상태가 지속되었다.
댈러웨이 부인은 침묵을 덮기 위해 매일 밤 파티를 열었다지만, 나는 더 깊이 가라않았고 강하게 고립되어 갔다. 욕실 거울에 묻은 치약 흔적, 여전히 굴러다니는 뒤집힌 양말, 큰맘 먹고 산 천연 비누에 눌어붙은 머리카락을 발견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평화도 휴전도 의미가 없어질 무렵 시애틀 이주를 결정했다.
영어 공부를 빙자한 G와의 만남은 녹슬어 쓸모없는 부속이 되어버린 ‘여자’라는 정체성을 되찾게 해 주었다. 나는 더 건강해지고 조금씩 즐거워졌으며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나풀거리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로드먼 브리지 위를 달리는 메릴 스트립이 되었고, 어느 날은 타이태닉호에서 열정을 불태운 케이트처럼 들뜨기도 했다. G는 낡은 트럭을 몰고 내 삶에 돌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결코 들켜서는 안 될 영화 촬영은 남편이 예정보다 일찍 짐 싸 들고 들어오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했다. 비록 제작이 중단된 삼류 영화에 불과했을지라도 여름 한 철, 나는 최고로 근사한 여인이었다. 어쩌면 G가 나에게 보낸 신호는 ‘찌르르’, ‘짜르르’가 아닌 다른 물질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서로에게 부도체가 아니었다고 믿고 싶다.
G의 SNS 대문에 여행지에서 아내와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다. 오래전 그녀와는 헤어졌고 더 사랑스러운 짝을 만났다. 꿀 떨어지는 눈빛을 보니 ‘저 꿀단지에 손가락이라도 푹 찔러볼 것을’하고 심통이 난다. 여전히 멋진 중년의 포스를 풍기는 G가 태평양 저편에서 행복하길 바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처 써먹지 못하고 날짜를 넘긴 상품권처럼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이제, 나에게 다시는 짜르르한 신호가 도착할 리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 충격파로 기절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일찌감치 쳐들어와 촬영을 중단시킨 이 남자와 내 다리, 네 다리를 서로 긁어가며 살아갈밖에. 가끔은 진한 커피 향을 느끼며 홀로 찍다 만 영화를 완성하는 짜릿함도 있을 터이니, 그 여름은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이 분명하다.
2020. 8월 한산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