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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박    
글쓴이 : 김창식    20-11-08 11:25    조회 : 10,504

  독박

  김창식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었나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를 그만두기 얼마 전 어느 해 알음알음으로 만난 '역전의 용사들'이 함께 뭉쳤다. 시작은 언제나 '화기애매(和氣曖昧)'하기 마련. 서로 인사를 나누는 둥 마는 둥 흰소리를 늘어놓으며. "자, 학교가시고오~." "사장님 신수가 훤~ 하시네." "오가는 현찰 속에 싹트는 우정." "진도 나갑시다." 어쩌고저쩌고….

  나는 '독일병정' 스타일로, 열고에 백병전을 즐겼는지라 늘상 피 흘리는 것이 일과였다. 자정을 넘겨 잠깐 방심한 사이에 대참사가 발생했다. 한 사람 앞에 가을날 추수걷이처럼 화투짝이 쌓이고, 나와 또 다른 ‘선한 사마리아인’은 가뭄 날 말라터진 논바닥처럼 처분만 바라는 신세가 됐다. 천기를 헤아리고 세상의 이치를 꽤 뚫는 그 자가 '고!'를 불렀다. 쓰리고에 따따따따, 피박에 광박까지. 아, 매정한 자여!

  그래도 ‘궁즉통(窮卽通)’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판을 주시했다. 어이없게도 내가 패 한 장을 던지면 다른 불우이웃이 판을 뒤집을 수도 있는 판세가 보이지 않는가.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패를 뿌렸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 패가 '독박(고스톱 용어. 해서는 안 되는 무모한 반칙)'이라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면 내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피바다에 뒹굴게 된다. 바야흐로 모든 것의 끝이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노름판에는 어디에나 적용되는 유니버셜한 규정이 있는가 하면, 국지적으로 통용되는 로컬룰이 있어 해석을 두고 선수 간에 설왕설래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도 생(生)과 사(死)를 가름할 절체절명의 순간임에야 말해 무엇 하랴. 고스톱 판에 매너 좋은 사람 없다. 매너가 좋은 것이 자랑도 아니다. ‘선자불래 래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 진짜 매너 좋은 사람은 고스톱 판에 오지도 않을 것이다. 독박이다 아니다로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데 누군가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독박 맞거든요!"

 무심코 시선을 돌리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까부터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는데 그의 시선을 느낀 때문인 듯했다. 그는 우리일행 중 누구와도 아는 사이인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언제부턴가 우리와 함께 있었고, 우리는 아무도 그에 대하여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초라한 행색에 희미한 얼굴 윤곽, 약간은 권태로운 표정이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그를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이 께름칙했지만 그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것이다. 오호라 너 잘 만났다!

  "당신 누구요?"

  "과객(過客)이지라."

  그가 태연히 대답했다. 나는 내 어이가 없는 한편 그 자의 당돌함이 분했다.

  "그러니까 과객이 뭐하는 과객이냐고?"

  그는 한심하다는 듯 그것도 모르냐는 듯 읊조렸다.

  "과객도 모르는감? 지나가는 사람이지라."

  나는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나보다 몇 살 아래일 것이라고 짐작되는 그에게 말려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러니까 지나가는 사람이 여기서 뭐하느냐고?"

  "구경하는 거지라. 구경 말고 뭐하남?"

  "지나가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지 여기서 뭔 구경을 해?"

  그러자 그가 메마르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말하듯.

  "상갓집에선 개도 구경하더구만."

  억눌렸던 분노가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다.

  "이런 개 같은! 여기가 상갓집이야, 상갓집이냐고?"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왜 문을 열어놨남?"

  그러고 보니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문단속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열어놓긴 누가 열어놨다고 그래? 열려 있었던 거지."

  그가 득도한 고승(高僧)이 경을 읽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영감이나 어르신이나, 노파나 할망구나, 그게 그거지라."

  나는 손아래로 보이는 자가 뭘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것이 영 마뜩치 않았다. 헌데 이상한 것은 우리 일행 중 어느 누구도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을 뿐더러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어어, 왜 이래?" "됐으니 그만 가쇼!" 등 한마디쯤 편들었을 법도 한데. 벌어지는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최소한 자기들의 일이 아니라고 손 놓고 방관하고 있었다.

  무럭무럭 피어나던 분노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임계점에 이르렀다. 와중에 그 자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아니면 분노의 줄기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얼핏 스치기는 했지만서도.

  "야, 이 호로새끼야 나가! 썩 꺼지라고."

  그러자 그가 느릿느릿 일어서며 탄식조로 뇌까렸다.

  "구경꾼이 구경도 못하남? 사람을 너무 핍박하면 끝이 좋지 않은 법인디…."

  그는 문가에 이르러 나를 향해 히죽 웃더니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왠지 목소리에 힘이 실리진 않았지만. "그리고 그것, 독박이라고요!"

  그는 그렇게 떠나갔다. 상황이 대충 정리되고 다시 우리는 게임에 열중했는데, 사람이 한번 갔다고 영원히 간 것이 아니었다.

  "꼼짝 마! 손들어! 동작 그만!"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경찰들이 들이 닥쳤다. 그자가 대동하고 온 것이다. 아니 알고 보니 그도 형사였다. 우리가 언제 이런 일을 당해보았던가. 화투짝을 치울 생각도 못한 채 얼이 빠져 있는데 그가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피곤에 지친 듯, 갑자기 늙어 버린 듯 쓰러질 것 같았다. 그가 힘겹게 말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라."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이윽고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사태의 진전에 얼어붙었고, 같이 온 경찰도 묵묵히 우리를 주시했다. 그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괴었다.

  "이 상황이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라. 제발…, 믿어 주셔.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는 숨쉬기가 거북한 듯 헐떡거렸는데 중병에 걸린 환자 같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수 십 년도 더 늙은 그의 얼굴은 숫제 눈물범벅이었다. 물줄기가 내(川)를 이루더니 범람하는 강(江)이 되었다. 그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것, 독박…. 독박 맞다고요!"

 *<한국실험수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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