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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화 곁에서    
글쓴이 : 옥화재    12-05-15 22:01    조회 : 3,763
매화 곁에서
                                                                                                                                      옥화재
까치발을 하고서 꽃을 딴다.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여러 날 뜸을 들이더니 더는 못 참겠는지 꽃잎을 열기 시작했다. 매화 향이 은근하다. 다닥다닥 많이도 달린 꽃 중에서 반쯤 벌어진 것들로만 골라 따는데 꽃잎이 상하지 않도록 정성을 기울인다. 갓 피어나는 꽃을 따내는 일이 아주 조금은 미안쩍어서 가만히 나무를 보듬는데 바람은 은근슬쩍 등을 다독이며 지나가고 먼저 핀 산수유도 배시시 노란 웃음을 날려준다.
가뭄에 단비 소식이 있더니 흐려진 하늘 탓인가 매화는 유난히 흰빛을 더하고 사위는 한없이 고요하다. 아껴두었던 다구일습(茶具一襲)을 챙겨 들고 천천히 원두막엘 오르는데 이는 매화가 피는 봄 동안 누리는 정신적 호사(豪奢)중의 호사인 매화차를 마시기 위해서다.
구례 매화마을에서 부쳐온 매실을 받으며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던 일도 옛일이 되었다. 양평 살이 시작한 첫해 봄. 회초리 같은 묘목 두 그루를 심었었는데 해마다 조금씩 양을 늘려 열매를 맺더니 지난해는 실한 청매실 한말 가웃을 수확해 두말들이 항아리에 매실효소를 담근 것이다.
화수분이라 했던가. 제대로 가꾸는 법도 사랑법도 알지 못하는데 해마다 열매를 쏟아낸다. 때를 따라 내리는 햇빛과 바람은 순전히 하나님 몫이고 난 그저 행복에 겨워 바라보기만 했는데 이렇게 풍성하다니... 한껏 벙글은 꽃잎과 바람이 입맞춤하면 향기가 번져나고 향은 벌과 나비를 부른다. 알 수없는 이 충만함. 하기야 어디로부터 오는지 헤아리지 못하는 복이 이 열매뿐일까.
이른 아침 성질 급한 큰 금붕어 한 마리가 연못 얼음 위에서 아주 긴 잠에 빠져있었다. 아직은 막 녹기 시작한 얼음 아래서 천천히 느린 삶을 살아낼 때이건만 느림의 철학을 미처 익히지 못한 녀석은 밤새워 얼음위에다 왜 천천히 살아야 하는지 크게 한 수 가르쳐 주고는 매화나무 아래 묻혔다. 어쩌면 매화 탓이라 써 놓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는 또 얼마나 많은 열매를 주려는지 기대하며 기다린다. 한 그루는 돌을 놓아 인위적으로 만든 언덕위에, 한그루는 평지에 있는 차이 뿐인데 시간이 쌓이면서 나무의 모양새가 달라졌다. 차별해서 거름을 준 일도, 공연히 화풀이를 한 적도 없건만 두 그루 사이에 확연히 차이가 난다.
평지에 심은 나무는 혼례전의 청년처럼 우람해 꽃도 열매도 실하게 달리는데 높은 곳에 심겨진 것은 왜소한 모양이 키를 쓰고서 소금 구하러 온, 오줌 싼 아이 같아서 늘 애잔했었는데 오늘은 매화 향에 취한 까닭인가 오히려 그림 속의 고목을 닮아 있어 정겹다.
사물의 가치야 보는 이의 소용과 안목에 의해 정해지지만 안목을 바꾸면 또 다른 가치가 만들어진다. 자칫 퇴출당할 번했던 매화를 10년 후 고목의 모습으로 상상하여 사랑의 대상으로 세웠더니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살짝 부는 바람에 은은하게 향을 실어내니 심은 자로써 이에 무엇을 더 바라랴.
산사(山寺)의 이른 봄, 눈 속에 핀 매화 가지를 꺾어다 방에 걸어두고 며칠이 지나게 되면 그 향기가 방에 가득 차오른단다. 그때 녹차 우린 물에다 매화꽃 두어 송이를 살짝 띄워 마시면 은은히 꽃 향이 우러나와 봄의 운치가 절로 느껴진다는 예찬이지만 내 것은, 뜰 안에 번지는 매화 향을 빌어서 봄과의 교접, 봄의 향연을 준비하는 팡파르가 된다.
진한 맛에 길들여진 내 입에 꽃차는 약간의 향으로만 남을 터인데 매화를 신호로 달려드는 봄을 내 힘으로 어찌 감당할거나. 거친 바람이 불어와 꽃비로 흩어 내리는 날 꽃잎과 함께 나도 뜰에 누워 뒹굴어 보면 겨우내 맺혔던 그리움의 격정들이 봄눈 녹듯 조금은 잦아들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시인은 작설차를 달빛차라 부르고 발그레한 빛과 은은한 향에 달빛을 끌어 들이고 싶다 했는데 아침나절 가만히 이는 맑은 바람을 꽃잎과 함께 담그노라니 매화차는 바람차라 불러도 좋을 성 싶다. 또 고요한 달빛이 영롱할 때면 무아의 심지로 돌아가고자 차를 달인다 했는데 나는 함께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을 벗이 그리워지면 잔 하나는 빈 채로 놓아두고 바람을 불러들여 차를 마신다.
가을이 이별이라면 봄은 만남이다. 가을이 고()라면 봄은 낙()이 되겠다. 기쁨을 위해 매화가 부풀어 오른다. 매화그늘에 봄이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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