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의 이름처럼
김숙
“네 이름은 물가 숙이야.”라고 아버지가 일러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까? 한글을 웬만큼 뗐고 낮은 자릿수의 곱셈과 나눗셈을 터득할 즈음이었다. 새로운 난이도의 학습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네모 칸 공책에 쇠 金, 물가 淑을 천천히 적으며 본을 보였다. 삐침과 파임, 가로획과 세로획들이 순서대로 나열되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무엇인가 질문하고 싶었지만, 절대적일 만큼 엄하던 시절이라 그러지 못했다. 평생 분신처럼 사용할 이름이니 잘 새기라는 당부 같았고 나름 아버지의 뜻한 바가 담겼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방바닥에 엎드려 새로 받은 화두처럼 뇌이며 쓰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서도 외우고 눈을 감고도 말했다. “물가 숙, 물가 숙, 물가 숙….”
중학생이 될 때까지 내 이름의 의미는 ‘물가’였다. 1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과 면담이 있었다. “이름이 맑을 숙이구나. 한 글자여서 외롭지 않겠니? 맑음이라…. 맑음이라고 하면 어때 발음하기도 수월한데?”라고 반농담처럼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부를 때는 “말금아”라고 하였다.
그때 알았다. 한자어 淑은 ‘맑다’나 ‘깨끗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라는 것을. 水(물 수)와 叔(아재비 숙)이 결합한 형성 문자라는 것을. 또 국어사전은 ‘맑다’나 ‘깨끗하다’라는 것을 물이 아닌 ‘사람의 성품’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내가 알던 ‘물가 숙’은 맑다거나 깨끗하다, 착하다. 어질다. 얌전하다. 아름답다. 등등의 뜻을 품은 글자였다. 아버지가 들려줬던 ‘물가’는 없었다. 그냥 글자를 쉽게 익히라고 삼수 변(?)을 ‘물가’로 풀어서 가르쳤나보다 여기다가 작명은 정성이 반이라는데 단 한 글자 이름이지만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기대가 있었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성명학까지는 아니어도 동양사상에 의한 사주와 획수 정도는 맞췄을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외자 이름은 주로 왕가에서 사용했다. 고려 475년 34대 왕들이 그랬고, 조선 시대에는 태종(이방원)과 단종(이홍위)을 제외한 25대 임금 모두 한 글자 이름이었다. 그렇게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왕의 이름으로 쓰인 글자는 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들의 이름을 홑 글자로 지어 백성들이 쓸 수 있는 글자가 줄어드는 것을 방지했다.
‘숙’이라는 글자는 아주 흔한 이름 자다. 우리나라 여성의 이름 중에 가장 흔한 호칭 중 하나다. 갑, 을, 병숙이, 일, 이, 삼숙이를 비롯한 세상의 온갖 ‘숙’이 봄 강변에 다북쑥처럼 우거졌다. 교실이나 사무실 등 같은 울타리 안에서 겹치는 이름도 많아서 각기 다른 별호를 붙이기도 했다. 발음이 딱딱했음에도 그리했음은 뜻을 좇았을 것이다.
다행이었을지 ‘숙’ 한 글자는 그나마 드물었다. 그런데 50대 때였다. 중등학교 교감 업무를 보았을 적부터였다. 같은 그룹 안에서 똑같은 이름을 만났다. 40대 중반의 장학사였다. 메신저 소그룹에 함께 속했다. 소속이나 간단한 소개 글이 적혔음에도 몇 번인가 잘못 온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영전을 축하합니다. 승승장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든가 엑셀 문서 작성 시트나 통계자료 파일이 첨부되어 오기도 했다. 나에게 올 메시지도 상대방에게 갈 것 같은 염려도 되었다. 무엇보다 통계자료나 엑셀 시트는 간단한 것이라도 조심스러웠다. 더러는 말없이 전송해 주기도 했다.
한 번은 안면이 있는 사람이어서 메시지가 잘못 왔다고 살짝 귀띔하는 답글을 보냈다. 무심히 한 자기의 클릭이 무색했던지 실수라고 여겨 자존심이 상했던지는 알 수 없었다. 메시지를 읽은 순간 그룹 명단에서 내 이름과 아이콘을 비활성화 처리하였다. 친절도 병이라고 조용히 씹어버릴 것을 괜한 오지랖이었음이 씁쓸했다.
담임 선생님은 이름이 한 글자여서 인생이 외로울 것을 염려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름에는 일종의 자성 예언 같은 것도 들어있으니까. 딱히 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지만, 사람들이 바라보는 외자 이름은 외로움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아주 어릴 때는 멋모르고 지냈다가 자라면서는 남과 다르니 특별히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늘 그렇지만도 않았다.
내 경우의 홑 글자 이름은 말 그대로 인생살이도 맑았다. 맑다고 곡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눈물 한 바가지의 구불구불 인생길이었지 싶다. ㄱ으로 끝나는 발음이 꼿꼿해 성격도 곧기만 했던가 보다. 왕족의 이름처럼 지었을지는 몰라도 한 글자 이름이 그다지 풍요롭지는 않았다.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모이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경계할 지경이었다.
어느 날 근무지에 도장 파는 사람이 찾아왔다. 요즘은 전자문서시스템 시대라 도장을 찍을 일도 별로 없다. 인사치레 정도로 응수했는데 집요하리만치 스탬프 방식 도장을 추천하였다. 한 가지 제안까지 곁들였다. 이름의 글자 수가 적으니까 어느 부분에 점 하나를 찍어주겠단다. 감쪽같이. 덧붙이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점이 글자 하나의 몫을 한다고. 안정되고 완전하며 운수대통할 것이라는 덕담은 맛깔난 고명이었다. 순간 얼굴에 점 하나 찍어 세상을 들끓게 했던 드라마가 떠올랐다. 웃음이 났다. 어딘가에 점을 추가하면 ‘내 이름이 점숙이가 되는 거야?’라고 스스로 묻다가 이 웃픈 해학에 슬그머니 동조하고 말았다.
주문했던 도장은 우편으로 보내왔다. 잉크를 머금고 있어서 누르기만 하면 선명하게 찍혔다. 인사서류나 승진 서류에 그 도장을 활용하였다. 내 길운뿐만 아니라 서류를 제출하는 이들의 뜻한 바가 잘 이뤄지도록 주문을 걸었다. 나와 다른 이에게 좋은 의미가 되기를 기원하였다.
그렇게 남이 모르는 비밀스러움도 간직했겠다 인감도장으로 등록하려 주민센터에 갔다. 일격에 거부당했다. 스탬프 방식 도장은 인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몰래 한 사랑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도장 속에 숨겨 놓았던 내 ‘점숙’은 지금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며칠 전 선운사 도솔암 내원 궁에 갔다.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가끔 선운산에 가면 지장보살을 보러 간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는데 난간에 출처 불명의 경구가 붙여져 있었다. “이름은 다만 이름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이름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지 않는다. 이름이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그 자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들었다. 왕족의 이름처럼 아버지가 지어 준 한 글자 이름 ‘물가 숙’으로, 선생님이 불러주었던 ‘말금이’로 어쩌면 고독한 여정의 격랑을 노 저어 왔다. 남은 삶에서 만들어 갈 이름은 시인 김춘수의 <꽃>에서 찾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라고 말한 것처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가다듬고 싶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나 또한 그의 이름을 부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