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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선의 품격( 범우에세이 '책과인생'2021.3)    
글쓴이 : 김주선    21-02-23 17:51    조회 : 10,428

  주선의 품격/ 김주선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을 보면 이름이 참 독특하고 시적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대다수 인디언은 삶의 경험이나 품성, 자연이나 상황을 묘사한 이름을 지으며 성도 없이 자연에 결속되었다. 주먹 쥐고 일어서서, 머릿속의 바람, 발로 차는 새, 그리고 영화 제목이기도 했던 늑대와 함께 춤을도 사람 이름이었다. 길지만 멋진 의미가 있었다. 한때 네티즌 사이에서 인디언식 이름짓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나의 생년월일을 앱에 넣으니 다음과 같은 이름이 만들어졌다. ‘조용한 황소와 함께 춤을’.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나라도 한 문장으로 된 이름을 가진 이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전국노래자랑에 나왔던 손 고장난벽시()’ 씨는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는 이름이었다.  

   이십여 년 전 가을, 강남에 있는 모 건설사에 취직했다. 첫 출근 날, 부서별로 인사를 다니는데 공사팀 이사가 자기 이름이랑 비슷하다며 반색을 하며 반겼다. 그 사람 이름은 김주성이었다. 촌수를 따져보니 같은 항렬의 종친이었고 포천사람이었다. 본인은 주도 7낙주(樂酒)인 주성(酒聖)인데 나는 자기보다 단수가 아래인 주선(酒仙)이니 나중에 겨루기 한판 하자고 아침부터 농을 던졌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사나흘 정신없이 보내고 신입사원 환영 및 퇴사직원 환송을 겸한 회식이 있었다. 삼겹살로 배를 채운 주당들의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성년이 되면서 자연스레 호프집을 드나들기는 했지만, 애주가는 아니었다. 게다가 매운 음식을 좋아해 식전에 먹는 청양고추 서너 개 정도는 애피타이저였다. 한번은 족발집에서 주문한 족발을 기다리다가 빈속에 소주 한잔과 청양고추 네 개를 한꺼번에 먹어 치우다가 위경련을 일으켜 119를 부른 사건이 있었다. 그때 정말 죽을 뻔했었다. 술을 못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안 마시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했다. 툭하면 위경련에 시달렸으니 말이다. 지금은 회사규정이 바뀌고 근무여건도 나아져 술을 권할 수 없지만, 예전에는 무슨 관례처럼 신고식을 치러야 정직원이 되는 양 분위기가 그랬다. 그때 주도를 배웠다. 꼿꼿하게 앉아 쌓인 잔을 비우느라 제법 마셨다. 졸지에 내 이름술의 경지에 도달한 신선’(주도 5)으로 불리게 되었고 변명의 여지도 없이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조지훈은 그의 시만큼이나 주도 역시 깔끔하기로 소문난 시인이었다. 당대의 주당으로 통하는 그가 술 마시는 품격이나 스타일별로 주도의 18단계(9~9)를 수필로 쓴 <주도유단(酒道有段)>이란 작품이 있었다. 주도에도 단이 있어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이나 직업, 주력을 알 수 있다고 하니 시인의 술 사랑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나열된 급수에 맞는 나의 주도를 곰곰 되짚어 보니 9급인 불주(不酒) (술을 아주 못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안 마시는 사람)인데 주선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술로 풀어보는 세상사 공부도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당의 최고 격인 9단의 열반주는 비로소 명인급에게나 붙는 단수였다. ‘그 이상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니 단을 매길 수 없다며 술 이야기를 써서 생기는 원고료는 술 마시기 위한 주전(酒錢)으로 삼는다는 시인이야말로 진정한 주선이 아닐까

   당나라 시인인 이백의 음주를 평가하는 말이기도 한 주선은 신선의 세계에서 멋을 풍기며 술을 마실 수 있어야 붙을 수 있는 이름이었다. 시선(詩仙)의 또 다른 말이기도 했다. 이백은 술을 마셔야 반드시 주옥같은 시가 나왔다고 하니 최소한 술과 시와 그리고 풍류가 있어야 주선의 품격을 갖췄다는 소리다. 호방하게 살다가 결국 강에 투신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지만, 술에 취해 달을 건진다는 명분으로 익사한 것이라는 주장은 그의 죽음조차 주선답게 지켜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리라우리나라 최고의 주선은 술자리에서 뛰어난 글솜씨로 문인을 매혹 시킨 황진이일 테지만 개인적으로 내 고향 영월의 시선 김삿갓을 꼽을 것이다. 술을 얻어먹고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던 것은 글 짓는 능력 때문이었고, 개중엔 시 한 수 받고자 옷을 벗고 잠자리를 청하는 여인도 있었다 하니 주선 중의 주선이었을 것이다.   

   의미와 뜻과 달리 짓궂게 오역되는 이름에 대해 개명을 고려해 본 적도 있었다. 뜬금없이 주선(周旋)을 좀 해보라는 이유로 모임의 총무를 맡은 적도 있었고 쌍방 간의 이견을 조율할 때도 나를 불러댔다. 남자 이름 같다는 이도 있었고 더러 술을 잘 마시게 생겼다는 비하도 들었다. 뉘앙스에 따라 술꾼이 되었다가 주선자가 되었다가 놀림감처럼 이리저리 치였다.

   나의 호적 명은 두루 주() 착할 선() 주선(周善)이다. 밤새 옥편을 뒤져 착한 마음씨를 두루 미치라는 뜻을 담았다니 인디언식으로 두루두루 착해라고 소개해도 되겠다. 훗날, 문학에 미련이 남아 개명할 요량으로 아버지의 작명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더니 한 말씀 하셨다. 착한 마음씨()에 글월 문()을 합치면 글 잘 쓸 선()’이 된다는 걸 알았지만, 이름자에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거창한 뜻을 담았다고 해서 이름대로 사는 것도 아니니 그저 순탄한 삶을 바란다고 하셨다.  

   건설사의 특성상 하청업자에게 도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때 도급비를 챙겨주지 못하자 일용직 근로자들이 몰려와 회사 정문에 진을 쳤다. 자리를 피한 회사대표를 대신해 포장마차에 풀어 놓는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곤 했다. 직장동료였던 남편은 노사를 조율하며 건설현장을 이끌었다. 작은 손가방 하나도 자신의 몫 인양 들어주며 나를 어여쁘게 챙겼던 흑기사였다. 결혼은 아름다운 구속이 되어 될 수 있으면 안 마시는 불주(不酒)의 사람이 되게 했지만, 주말 저녁 오붓한 치맥의 시간만은 함께 나누었다.  

   지난날의 유치찬란한 일기와 객기로 휘갈긴 신변잡기를 가끔 블로그를 통해 들여다본다. 비록 풍류의 멋은 없지만 내 삶의 단편이기도 한 문장이 새삼 반짝거린다. 감히 주선(酒仙)의 반열에 오르고자 이름을 욕보인 것 같아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도 크지만, 김 아무개면 어떻고 김 거시기면 어떠한가. 본명은 주선(周善)이요, 필명은 주선(酒仙)이라 적어두고 막힌 맥을 짚어 글감 하나 건졌으니 이 또한 약주가 아니겠는가.  

    따뜻한 청주 한 잔으로 마음을 데워 수필 한 가닥 쓰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교양있는 주선의 품격으로 봐줄까.

 

 

  범우에세이 '책과인생'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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