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밭 호랑이에게
김단영
수수가 심어진 시골길을 걷다 문득 당신 생각이 났어요.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다는 당신을요. 왜 하필 수수밭일가요? 궁금했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수를 경작하는 농가를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더라고요. 쌀보리처럼 주식이 아니라서 그저 자투리땅 귀퉁이에 조금씩 심는다고 하더군요. 예전에는 자녀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생일 때마다 수수팥떡을 해 먹였답니다.
운동을 하려고 나선 걸음이었어요. 집에만 갇혀 지내는 날이 너무 길어지고 있거든요. 옛날에는 호환마마가 제일 무서웠다지만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마마처럼 무서워요.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때는 마스크를 꼭 써야 하지만 나는 마스크를 벗은 채로 인적이 드문 시골길을 택해 나섰더랬어요. 혹시 사람을 만날까 걱정을 하면서도 숨쉬기는 편하고 좋았지요.
아직 한낮의 햇볕은 내 머리꼭지를 익혀버릴 듯이 따갑게 내리쪼이고 있어요. 당신이 잡아먹으려고 쫓던 오누이가 하늘로 올라가 해님 달님이 되었다지요? 수수를 익히느라 오누이가 제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인가 봐요. 해와 달이 떴다 기울기를 반복하는 동안 당신이 떨어져 죽었다는 수수밭은 무심하게 영글어 가고 있네요.
어릴 적에 동물원에서 당신을 본 기억이 있어요. 옛날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호랑이를 요즘엔 직접 보기 힘들지요. 동물 인권을 염려하여 더이상 좁은 우리 안에 가둬두지 않기 때문이에요. 두해 전, 내 고향 봉화(경북)에 갔을 때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거기에 ‘백두대간수목원’이라는 국립공원이 있거든요. 천오백만 평이 넘는 땅에 희귀 및 멸종위기에 처한 산림과 생물을 보전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에요. 그곳에 진짜 호랑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달뜬 마음으로 세 번이나 달려갔더랬지요. 한번은 명절 뒷날이라 휴관이었고, 이듬해엔 태풍으로 임시휴관이라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어요.
세 번째 방문했을 때, 트램을 타고 이동하면서부터 몹시 설레고 흥분되었지요. 전기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먼발치에서 당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중으로 설치된 담장은 쥬라기 공원을 연상시켰는데, 어떤 남자가 철책을 흔들며 호랑이를 희롱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거리는 멀었고, 울타리가 사람을 보호해주리라 여긴 까닭이었겠지요. 가로놓인 그 울타리가 없었다면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생각해보면 당신은 태초부터 우리와 함께해온 존재였어요.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일을 견디는 시험을 치루고, 곶감을 무서워하거나 꾀 많은 여우에게 속아 넘어가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친숙하고 해학적인 이면에 당신은 은혜를 갚거나 효자를 지켜주는 우리민족의 수호신과 같은 양면성을 가졌어요. 우리나라 지도 모양을 가만 보면 호랑이를 닮았잖아요? 호랑이를 빼놓고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이야기하긴 힘들 것 같아요. 일제 강점기에는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려고 대대적으로 호랑이 사냥을 나섰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참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어요.
호랑이하면 또 우리 스승님이 떠올라요. SDU 문창과에 수필 동아리 이름이 ‘수수밭’이거든요. 임헌영 지도교수님을 처음 뵀을 때, 눈썹을 보자마자 호랑이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지요. 합평 시간에 콕콕 예리하게 지적하시는 걸 보면 영락없는 호랑이 선생님이세요. 교수님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계시며 무엇보다도 허리가 잘린 우리 호랑이 민족의 문제를 연구하는 분이세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장과 문학평론가로 활동하시는데, 1970년대에 필화 사건을 겪으시고도 그 신념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면 진정한 호랑이의 기상이 느껴진답니다.
그리고 또 호랑이하면 부모님이 떠올라요. 어릴 때 나는 우리 엄마가 이야기 주머니를 가지고 다닌다고 생각했어요. ‘어흥!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옛날얘기 해달라고 조를 때마다 엄마는 재미난 호랑이 이야길 꺼내어 들려주시곤 했어요. 듣고, 듣고 또 들어도 재미난 옛날이야기. 레퍼토리가 조금씩 바뀌면서 무진장 펼쳐지는 즐거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요. 나는 중학생이 되어 엄마가 문맹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많이 부끄러워했던 기억도 나요. 참 철이 없었던 거죠. 엄마는 스스럼없이 지냈지만, 아버지는 좀 엄하신 편이었어요.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와 함께 교복을 사러 ‘자갈치 시장’엘 갔어요. 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낡은 동전 지갑을 털어서 내 손에 몽땅 쥐여 주시더군요. 혹시라도 인파에 휩쓸려 아버지를 놓치면 103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찾아가라고 일러 주셨어요. 바깥에서 다정하게 딸의 손을 잡고 다니시는 분은 아니었거든요. 다행히 길을 잃고 헤매지는 않았나 봐요. 육남매 중 형제서열이 다섯째라 부모님께 사랑을 받았다는 특별한 기억은 없어요. 아버지랑 단둘이 외출하여 교복을 사고, 책가방을 고르던 모습이 유일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부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그전에 봉화에서 살 때는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어요. 백두대간 끝자락이라 땅이 척박하여 밭농사뿐이었어요. 곡수가 많이 나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수수를 꼭꼭 한줌씩 심으셨을 거예요. 숙모님이 그러셨거든요. 너희들 생일 때만은 꼭 수수팥떡을 해 먹이셨다고요.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이지만 쌀보리 대신 옥수수와 조밥을 주식으로 먹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어요.
바람에 나부끼는 수수의 가장자리가 빨갛게 보이네요. 얼룩덜룩 정말 피가 묻은 것 같아요. 수수는 옥수수와 달리 맨 꼭대기에 달린 열매만 거두는데, 곡물을 털어내고 수숫단을 묶어 빗자루를 만들기도 해요. 우리 동네에서는 농협과 계약 맺은 몇몇 농가만 수수를 재배하고 있어요. 수입산 수수가 저렴하기 때문에 국산은 농사지어 품값 받기가 힘들다고 해요. 열매를 자르고 남은 수숫대는 짐승의 사료로 쓰기엔 너무 억센 감이 있어요. 대신 추운 겨울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 있지요.
어른이 되면서 당신이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어요. 혹시 수수 알갱이 끝에 얼룩진 붉은 빛깔 때문에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까 생각했답니다. 피는 희생을 뜻하잖아요. 생명이기도 하구요. 당신의 피로 물든 수수밭!
전래동화에 나오는 호랑이가 엄마의 팔다리를 하나씩 먹었다는 화소가 사실은 오누이의 성장으로 인해 엄마의 역할이 하나씩 사라지는 의미라고 해석하더군요. 오누이를 쫓다가 썩은 동아줄이 끊어져 죽은 당신의 죽음, 농경사회에서는 그 희생의 제물로 인해 더 큰 풍요를 가져오리라 믿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수수밭에 떨어져 죽은 호랑이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어요.
돌아오는 길에 석양을 만났어요. 저물어 가는 붉은 노을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지요. 하루, 한 달, 한 해.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며 어느덧 내가 걷는 인생길도 저물고 있음을 느껴요. ‘풍요롭지도 외롭지도 않은 무심한 생이 흐르건만, 저무는 것이 나만이 아님이 문득 고맙다’는 유승도 시인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는 해를 거듭하며 연년이 붉은 수수를 익히겠지요. 해와 달이 영원하듯이 당신의 이야기 또한 변함없이 전해지리라 믿어요. 당신이 피 흘린 자리에서 붉은 수수처럼 나의 연수도 함께 익어 갑니다.(끝)
-한국산문 2021년 11월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