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는 AI / 김 주 선
'그날은 구름이 드리운 잔뜩 흐린 날이었다. 방안은 언제나 최적의 온도와 습도. 요코 씨는 그리 단정하지 않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시시한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신문 2016.03.23. 인용)
이 글은 AI가 단어를 조합해 만든 문장이다. 전혀 어색하지 않다. 불과 몇 년 전 일본 모 신문사가 주최한 공모전에 AI가 소설까지 도전했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본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등단하는 시대도 올 것 같다. 인물이나 플롯을 구성해주면 알아서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만든다니 이제 인간 고유영역의 범위는 어디까지라고 해야 할까. 업계에서는 플롯까지도 짜는 인공지능이 최종목표라니 독자의 시각도 이젠 달라져야 할 때인 것 같다.
얼마 전 청계산 입구 모 식당을 찾았다가 놀라운 경험을 했다. 서빙 로봇이 등장해 테이블로 음식을 나르고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말까지 상냥하게 했다. 이미 코로나 이전에 강남권을 중심으로 선을 보였다고는 하나 일반 음식점까지 도입될 줄은 몰랐다. 오래전 로봇청소기가 우리 집 거실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때 예견했지만 이렇게 빨리 도래할 줄은 몰랐다. 최첨단 소프트웨어기술을 탑재한 인공지능 로봇이 좁은 통로를 자율주행하며 음료수 한 방울, 음식 한 점 흘리지 않고 주문한 손님의 테이블로 찾아왔다. 아무리 비대면 서비스라 해도 코로나의 대유행이 가져온 일상의 변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식당에 들어가면 주문받는 사람 자체를 보기 힘들다. 테이블에 놓인 아이패드로 각자 알아서 주문하고 사람이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인사를 하는 것도 인공지능이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바뀌는 것들은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나이 드니 이런 것이 참 불편하고 서럽다. 나는 기계치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처음 보내보던 어르신처럼, 주문 하나 하는데 손이 말을 안 들어 결국 긴급 호출을 눌렀다. 첨단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소외되는 아날로그식 시간이, 울컥 또 서러워졌다. 이때 (나를 지켜봤을) 젊은이가 안에서 나오더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니면 ‘무서워하지 마세요.’라는 무언의 눈빛을 주더니 노련한 손가락으로 주문을 도와주었다.
아무리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라지만, 인간의 가치판단이나 창의력은 기계가 할 수 없다고 믿었는데 이마저 가능하게 된 시대가 된 모양이다. 사실 작가는 작가만의 감성, 창작, 그리고 로봇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절대 희소성이 있다고 믿었다. 예술인지 기술인지 분간이 안 되는 인공지능 앞에서 나는 왜 자꾸 작아지는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도 이미 시도 쓰고 시집출판도 한 AI가 있다지만, 문학적 가치를 부여하기는 아직 부족하다고 한다. 하지만 무서운 성장을 해오는 인공지능 문학은 지금, 이 순간 또 어떤 놀라운 기술을 선보일지 모를 일이다.
최근 한국의 모 대학에서도 AI 소설 공모전이나 백일장을 열었다. 문학 전공자의 참여가 아닌 자연과학 전공자의 백일장이라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인간이 먼저 제시어를 던져주면 인공지능이 문장을 연결해 가는 식이란다. 가령 ‘가을이 오면’이라고 입력하면 ‘바람이 잎사귀에 정갈하게 흔들린다. 달과 별을 만나는 이 소리는 날이 갈수록 그리움으로 몸집을 불린다.’라고 감성 충만한 문장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AI 백일장에 참가한 대학생이 낸 수필은 거의 수준급이었다. 어색한 문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데이터를 많이 축적하고 자기 학습을 많이 한 AI일수록 완벽한 문장을 만든다고 하니 아직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합작이라고 보는 게 맞다.
몇 해 전만 해도 시나 소설은 인공지능이 시도했지만, 수필은 시도하지 못한 장르라고 해 안도했건만 이젠 수필 또한 가능해졌다고 한다. 자신만의 경험과 체험으로 쓰는 수필인데 어찌 대체가능 하단 말일까. 한 사람의 생애, 정보, 살아온 추억, 기억을 저장하면 가능한 것이라니 이 또한 놀랍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첫 대결은 시험 무대였지만, 이제 이세돌은 절대 알파고를 이길 수 없다. 전 세계가 코로나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인공지능은 이제 모든 영역을 장악했다. 독거노인의 고독사를 방지하기 위해 맥박을 체크하고 위험을 감지하는 모바일이 이미 선을 보였고 고령화 사회의 첨단 AI가 노인 가정에 보급되고 있다. 법전을 꿰고 있는 AI 판사의 판결은 정확해서 그 누구도 억울하거나 부당한 판결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예술을 다루는 직업, 음악과 미술 그리고 영화 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의 창작 범위는 무궁무진하며 광범위하게 추진되고 있다. 베토벤의 ‘미완성교향곡 10번’이 세계적인 음악가와 AI가 힘을 합쳐 완성되었듯이 창작 능력마저 빼앗기는 우려는 분명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내 생전에 실현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수필 앞 페이지 작가명 란에 이제는 ‘AI 000’이라고 적을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AI 작가라니, 엄밀히 말해 작가가 아니고 편집자이거나 매니저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가까운 문우를 만나 차를 마시다가 AI 백일장으로 화두가 옮겨지자 문학의 종말이라며 친구가 개탄했다. 아무리 인공지능 시대라도 문학이나 예술은 절대 AI가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며 AI 쓴 글은 읽어볼 가치도 없다며 선을 그었다. 아이러니지만 그 친구만큼 최첨단 가전제품을 집안에 들여 수혜를 보는 사람도 드물기에 나는 살짝 비꼬아주었다. 요즘 인공지능 아닌 물건이 어디 있는가. 하물며 밥솥조차도 찰진밥 해줄까? 된밥 해줄까? 삼시세끼 꼼꼼히 따져 묻는다. 모든 걸 누리고 살면서 문학이나 예술은 왜 AI가 하면 안 되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얼마나 모순인가.
요즘 뜨고 있는 모 보험사의 광고 모델 로지(ROZY)가 AI 인플루언서라는 것을 안 많은 팬이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말해주지 않았으면 아무도 몰랐을 일이다. 로지는 SNS를 통해 수만명의 팔로워와 소통하며 일상을 공유하는 가상 인물이다. 팔로워 사이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매우 크므로 화보 같은 그녀의 일상과 패션을 광고계는 주목한다.
앞으로 어떤 AI 인플루언서가 우리를 놀라게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학을 통찰한 AI 작가라고 예외가 없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