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는 나의 힘
지난해 여름 '진인(塵人) 조은산‘이란 사람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린 청원 글 ‘시무7조’ 내용이 세간에 알려지며 코로나 시국으로 불안한 여름을 더더욱 달구었다. 고려시대 문신 최승로(崔承老)의 시무책(時務策) 형식을 본 딴 상소문에 전, 현직 장관과 정치인의 이름을 끼워 넣은 언어유희가 눈길을 끌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올해 봄에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토지 투기 의혹으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국민 모두의 공분을 산 현안을 두고 여야가 서로 이로움을 좇아 책임 공방을 하는 와중에 패러디도 ‘당근’ 나돌았다. ‘LH' 영어 글자와 우리글 단어 ‘내’의 모양이 비슷한 데 착안해 영화 <내부자들>에 나오는 힘 있는 자들의 뒷거래를 되비춘다든가, 밀레의 소박한 전원풍 그림 <이삭줍기>에 ‘묘목심기’라는 제목을 달아 빗댄다든지...
본디 ‘패러디(parody)’는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 또는 그런 작품’을 가리킨다. ‘다른 노래에 병행하는 노래’란 뜻의 그리스어 ‘파로데이아(parodeia)’에서 유래한 말로 단순히 다른 작품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안고 있는 본 뜻을 내보인다. 그러니 대상이 되는 작품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먼저일 터.
사전적 정의나 용례는 그렇다 치고, 패러디는 잘만 하면 단번에 눈길을 끌고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웃음을 자아내는 패러디는 원문의 참뜻과 연계해 경계를 확장하는 새로운 소통방식인 것이니까. 물론 재미와 희극성만을 강조해 지나치게 격이 떨어져 원문을 훼손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 글에서는 직접 만든 패러디를 소개한다. 패러디는 나의 힘!
<질투는 나의 힘(2002, 감독 박찬욱)>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착실한 남자와 자유분방한 여자가 만난다. 그러다 여자가 로맨티스트 성향의 다른 남자에게 끌리고, 원래의 순진한 남자는 질투를 느껴 절망감에 사로잡힌다는 통속적인 흐름이다. 질투에 일상을 내맡긴 남자가 어떻게 되는지, 질투의 속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은 독자에게 맡기고 모호하게 끝난다. 질투에는 반복성이 있어 습관이 되고, 나도 모르게 밴 습관이 삶의 어려운 국면을 극복할 역설적인 힘이 될 수 있음을 말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기형도(1960~1989)의 시 <질투는 나의 힘>에서 제목을 빌려온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내가 살아가는 힘은 ‘질투’라고.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나아가 시인은 고백한다.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자를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나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영화에서는 타자에 대한 질투나 위화감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자문했음 직한 질문이다. 격식을 갖춰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거나 답변을 못한 질문이기도 할 터이고. 어쨌거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힘에의 의지’(니체) ‘표상을 좇아서’(쇼펜하우어) ‘불안을 극복하려고’(키에르케고르), ‘그냥 세상에 던져졌으니까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며’(하이데거)
? 어쩌면 ‘나도 몰라’나 ‘어떻든 살아야 해서’, 또는 ‘이유도 없고, 이유가 없으니 대책도 없이 그냥’이 차라리 그럴듯해 보인다. 누군가는 신의 섭리를 내세워 ‘이 모든 것이 그분의 계획에 있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한편에선 떨떠름해 할 것이다. 그딴 이야기는 세상물정 모르는 배부른 자들이나 하는 이야기니 그러지 않아도 힘든 세상 ‘그냥 대충 살자’고. 이쯤해서 우리 시조 한 편이 생각난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 고려 말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 충신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마음을 떠본 <하여가(何如歌)>다. 영어로는 “하어바(How About)?", 그 바닥 전문용어를 빌리면 “콜. 우리 그냥 묻고 가자, 응?”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런 제의를 받는다면 요즘 보통 사람 그 누군들 <단심가(丹心歌>의 정몽주처럼 결연한 충정과 의기를 떨칠 수 있으려나.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그런데 잠깐,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가 환청인 듯 들려오는 것은 무슨 까닭이람? “마이 웨이(My Way)!"
# <<계간수필>> 2021,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