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터
김창식
쓰레기를 줍는다. 자기 집 쓰레기도 손대기 꺼리는 사람이 남의 집 쓰레기를 줍는다니 쑥스럽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쓰레기를 수거, 정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분들이 실제 따로 있기도 하다. 쓰레기 용역을 하는 업자가 있고, 공동주택인 경우 경비원이 그 일을 거들거나 대신한다. 나는 그저 쓰레기터 주위에 흩어진 또 다른 허섭스레기를 치우는 것일 뿐이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쓰레기를 보면 인간이 본디 착한 성품을 타고났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엄연히 수거함이 있지만 쓰레기를 함부로 흩뿌려 놓는 일이 다반사다. 분리함이나 포대, 자루 같은 용기가 있는데도 구분하지 않고 그냥 내다버린다. 폐지, 전구, 생선뼈, 닭발, 술병, 담배꽁초, 가전제품, 수상한 횟가루에 이르기까지 쓰레기 종류도 다양하다. 어디서 본 듯한 헌 우산도 눈에 들어온다. 설마 우리 가족이 버린 것은 아니겠지.
나 보란 듯, 아니면 남모르게 ‘쓰레기무단투기금지’ 팻말 밑에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쓰레기를 보면 적개심에 가까운 화가 치솟는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고 싶고, 우연히 현장에서 마주치면 한바탕 해대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고 숨어서 누군가의 범행 현장을 포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함은 커져만 간다. 시인 이상의 「오감도(烏瞰圖)」를 패러디해 시름을 달랜다.
“제1의 아해가 쓰레기를 버리오/제2의 아해도 쓰레기를 버리오/.../제13의 아해도쓰레기를 버리오/.../쓰레기는 아니 버리는 게 차라리 나았소.”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말은 적어도 쓰레기터에서는 들어맞지 않는다. 쓰레기 치우는 사람들의 손이 못 미친 채로 담배꽁초나 휴지조각, 비닐봉지 같은 허섭스레기는 쓰레기터 밖에도 널리게 마련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던져진 존재(geworfenes Dasein)’로서의 대상과 존재 양식의 상관관계도 생각난다. 쓰레기는 누가 버렸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냥 그곳에 던져진 채로 존재한다.
쓰레기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오래 전 손에 쥔 휴지조각을 그냥 버릴까 망설이다 그래도 예의상 한 차례 주위를 한차례 휘둘러보는데 버스정류장 옆에 쓰레기통이 보였다. 그런데 휴지통 옆면에 쓰인 글자가 이상해 멈칫했다. ‘이쓰레기’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인간쓰레기? 고개를 갸웃하며 자세히 보니 ‘일반쓰레기’의 자모와 받침이 떨어져나갔다. 아니, 내가 쓰레기란 말인가? 자격지심이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쓰레기 터를 서성이며 이러저러한 궁리를 하다 그럴 듯한 생각이 떠올랐다. 담배 쓰레기라도 내 주관으로 처리할 수 있으면 낫지 않겠는가? 과장해서 말하면 이 한 몸 살짝 희생해서 더불어 사는 이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알량한 생각 말이다. 집에 깨진 도자기 사발이 있어 갖다 놓았더니 담배꽁초가 쌓인다. 그것만으로도 주위가 몰라보게 동네가 깨끗해졌다. ‘근데 우리 동네 맞아?’
쓰레기 터가 맺어준 인연이라면 인연일 수 있는 일도 있다. 파지(破紙) 줍는 노인과의 만남이다.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쓰레기를 주어 생업을 꾸리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쓰레기가 필요 없어 버리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쓰레기가 필요해 그에 기대 삶의 도움을 얻는다. 등이 굽고, 앞니가 빠진 할아버지와는 그런대로 친해져 인사말도 주고받게 됐다.
할아버지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 파지를 수거하면 주변이 자칫 더 지저분해지기 마련인데 늘 깔끔하게 정리를 해놓는다. 할아버지가 머물렀다 가면 쓰레기터가 갓 세수한 것 같다. 내심 고마움을 느끼던 차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넨다. 할아버지가 답례로 얼굴을 찡그려 웃는다. 할아버지를 보면 사람이 본디 선하게 태어났다는 성선설을 믿고 싶고, 그런대로 살고 싶어진다.
한편 쓰레기터는 그냥 쓰레기터일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쓰레기터가 악취가 나고 지저분해서 마냥 꺼려지는 곳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사람 오가는 기척 없는 한밤의 쓰레기터를 그려본다. 음식물찌꺼기, 조개껍질과 생선뼈의 무덤인 쓰레기터는 일용직 쥐들의 치열한 노동 현장, 아니면 쥐와 고양이와의 쫒고 쫒기는 술래잡기 놀이터일 수 있다. 한걸음 다 나아가 쓰레기터를 무대로 뮤지컬 <캣츠>의 리허설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도시의 구석 쓰레기 터에 고양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선지자 고양이, 광대 고양이, 망나니 고양이, 상류층 고양이, 도둑고양이…. 따돌림 당하는 유흥가 출신의 늙은 고양이 그리자벨라도 있다. 파티가 시작되어 춤과 의식을 벌인다. 그리자벨라는 과거를 회상하며 노래 「메모리(Memory)」 를 부른다.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삶을 살리라 마음을 다잡는 노래다.
설마 쓰레기 터가 고양이들이 저마다의 몸짓과 표정으로 매력을 뽐내거나 관객의 마음을 훔치는 무대는 아니리라. 한 밤중 실제의 쓰레기터는 다를 것이다. 구름에 잠긴 달이 메마른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내려다보고, 어둠에서 뻗어나온 전깃줄은 더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집 잃은 새 한 마리쯤 지붕 처마를 들락거릴 것이다. 이따금 바람이 일며 흐느끼는데 쓰레기터를 경계로 마주선 가로등끼리 창백한 빛을 흩뿌리며 서로를 위로하리라. 술이 거나한 취객 한 사람쯤 쓰레기터 벽에 반쯤 등을 기댄 채 허공을 향해 푸념을 할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쓰레기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형편이 좀 나아져 컨테이너박스 빌라촌을 떠나 그런대로 편의시설이 갖춰진 주거형 오피스텔로 이사를 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전에 살던 동네의 널브러진 쓰레기 더미가 가끔 떠오르고, 악취마저 그다지 싫지 않게 끼쳐오며, 허리 굽은 파지 줍는 할아버지가 나도 모르게 생각난다는 것이다.
*수필 오디세이 2021 Winter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