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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려장    
글쓴이 : 윤기정    22-04-03 01:25    조회 : 3,702

청려장(靑藜杖)

윤기정

 한여름 더위를 피해서 쉬었던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 남한강의 물길과 나란한 외길은 한적하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이들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마음 편한 길이다. 그들과 마주칠 때면 난감하다. 오던 길로 돌아가자니 꽁무니가 부끄럽고 그대로 가자니 조바심이 난다. 조바심도 조바심이지만 두려운 내색을 감출 수 없어서 창피하다. 개의 시선을 피하려 길가로 바싹 붙어 걷는다. 지나치고 나서도 뒤가 켕긴다. 볼품없을 내 모양새에 화도 난다. 그럴 때마다 작대기라도 들고 나왔으면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산책길에 으레 지팡이를 들고 나선다.

지팡이는 오래전에 장인(丈人)이 어머니 쓰라고 만들어 준 청려장(靑藜杖)이다. 청려장은 명아주의 대로 만든 지팡이를 일컫는데 짚고 다니면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고, 신경통에 좋다고 하여 귀한 지팡이로 여긴단다. 조선 시대에는 여든 살이 되면 임금이 조장(朝杖)이라 이르는 청려장을 주어 장수를 축하하고 노인의 상징으로 여겼다고도 한다.

청려장의 먼지를 닦아내니 광택이 살아났다. 가볍고 손아귀에 잡히는 맛도 괜찮았다. 지팡이는 걸을 때 도움을 얻기 위하여 짚는 것이지만 호신용으로도 딱 좋을 듯했다. 조선 시대라면 나라에서 주는 국장(國杖)을 받을 나이니 지팡이를 들고 나서도 남들 보기에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팡이를 감듯이 용틀임한 줄기는 핏줄 불거진 남정네의 팔뚝처럼 든든해 보였다. 가지를 쳐낸 자리의 옹이가 단단한 느낌을 준다. 청려장의 용틀임과 적당한 길이와 은은한 광택이 살아온 시간과 헤쳐 온 세파가 빚은 노년의 어른다움과 지혜의 상징 같기만 하다. 청려장을 들고 나서니 절로 어깨가 쭉 펴졌다. 걸음에 맞추어 가볍게 흔드니 발걸음도 사뿐했다.

지팡이는 신화나 전설 · 설화 · 종교 · 동화에 두루 등장한다. 한양 길 짚어가는 심 봉사의 지팡이, 부석사의 선비화, 용문사의 은행나무로 자랐다는 의상대사의 지팡이, 바닷물을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솟게 한 모세의 지팡이처럼 생성과 구원의 지팡이도 있다. 인간이 지팡이에 육신만 기댄 것이 아니라 구원과 위로를 얻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기 때문이리라. 죽장 짚고 삼천리 방랑하던 김병연도 지팡이에 고단한 몸만 아니라 가눌 길 없는 마음도 기댔을 것이다.

지팡이가 혼자일 때는 단지 막대기일 뿐이다. 누군가가 기대야 비로소 막대기는 누(군가)의 지팡이가 된다. 세월이 지나면서 누군가와 지팡이가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청려장의 손잡이는 명아주의 뿌리였다. 지팡이 발은 명아주 줄기 끝이었다. 청려장은 지팡이가 되기 전의 위와 아래를 기꺼이 바꾸었다. 생전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관절염과 치매로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 했다. 대학 병원의 번잡함 속에서 어머니는 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파 속에서 엄마를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의 불안한 눈빛과 다르지 않았다. 지팡이에 기댔던 아이가 지팡이가 되고 그 지팡이에 어미가 기댄다.

어머니의 모습을 좇다가 가없이 지나온 길을 떠올렸다. 그 길 어디쯤에서 지팡이에 기대어 기운을 차리기도 했다. 바로 설 때까지 기꺼이 함께 흔들려 준 지팡이도 있었다. 누군가의 지팡이가 되어 함께 흔들린 시간도 있었을 텐데 얼른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지팡이가 되어준 일보다 의지한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인가 보다. 홍해를 가른 모세의 지팡이나 영화 속 선지자나 고승이 짚은 지팡이는 지팡이를 든 사람보다 커 보인다.

높고 거룩한 곳을 가리키는 지팡이는 커야 어울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의 말이 꼭 길어야 하지 않듯이, 육신과 마음 하나 기댈 지팡이는 그리 크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누군가의 지팡이였던 기억이 많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할 일이, 갚을 일이 남아 있음이 아니랴? 가장 낮은 곳에서 대지를 두드리는 지팡이 발처럼 고단한 품을 아끼지 않으리라. 기꺼이 누군가의 지팡이가 되고, 위로의 짧은 말이 되고 싶다. 떠나기 전에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과 반려견이 나타났다. 개는 몇 발 앞서 걷다가는 멈추고 주인을 돌아보다가 다시 앞서고 멈추어 돌아보기를 거듭한다. 그때마다 그들은 따뜻한 눈 맞춤을 한다. 그들도 서로에게 지팡이임을 본다. 한갓 짐승도 누구의 지팡이가 될 수 있구나. 어디 짐승뿐이겠는가? 새벽 동창을 붉게 물들이는 일출은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가? 이슬 머금고 새로 핀 꽃 한 송이가 주는 기쁨은 또 얼마나 벅찬가. 마음 기댈 수 있다면 온 누리가 지팡이 세상이다. 내일은 청려장을 두고 나올까 보다.

2019. 9. <한국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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