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말
초등학교 입학식 날 선생님들이 계시는 곳으로 나도 모르게 들어갔다. 학교에 가는 첫날인데도 부모님이 함께 가지 않았다. 혼자 학교에 가긴 했는데 어디로 들어갈지를 몰라 헤매다가 들어간 데가 교무실이었다. 낯선 풍경에 울음보를 터뜨렸다. 조그만 아이가 갑자기 들어와 울고 있으니 선생님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느 새에 한 분이 다가와 상냥하게 이야기했다.
“왜 그러니? 오줌이 마렵니?”
조그만 아이가 보기에도 그녀는 피어오르는 한 송이 장미 같았다.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오늘 처음 학교에 왔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이곳으로 들어왔어요.”
그녀는 내 이름을 확인한 후에 침착하게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기다려. 네가 가야 할 교실로 데려다줄게.”
잠시 후 업무를 마쳤는지 나를 데리고 교무실을 나섰다. 도착한 곳은 1-2반 팻말이 붙어있는 교실. 그녀는 1-2반 담임선생님이었고, 나는 1학년 2반으로 배정된 것이었다.
인천에서 교대를 졸업하자마자 우리 학교로 발령받은 명00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한글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으니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성격이 온순한 게 마음에 들었는지, 선생님은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1학년 겨울 방학을 앞둔 어느 날, 선생님은 신기한 이야기를 하셨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때 1년 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한 아이에게 원하는 선물을 가져다주실 거야.”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문에다 양말을 꼭 걸어놓으세요.”
작은 시골 동네인 우리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다. 또한, 우리 집은 유교적 전통이 강했기에 교회나 크리스마스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러니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문고리에 양말을 걸어놓으면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너무나 솔깃할 수밖에. 아이들 대부분 그러하듯이 나 역시 선생님의 그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리고 12월 24일 저녁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대하며 방 문밖의 검은 문고리에 양말을 걸어 놓았다. 잠들기 전까지 마음이 너무 설렜다. ‘무슨 선물을 가져다주실까?’
예전 시골 마을의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창호지 문은 겨우 냉기를 막는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 문풍지 틈으로는 찬 바람이 술술 들어왔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방안에 놓아둔 사발 속의 물이 밤사이 꽁꽁 얼어 얼음덩이로 변하는 건 흔한 일이다. 문에는 안팎으로 모두 둥근 모양의 검은 문고리가 있었다. 손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차가운 문고리에 정성스레 양말을 걸어놓았으나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지만 어쩌겠는가?
명00 선생님은 3학년까지 연속 3년 동안 담임선생님을 하셨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양말을 걸어 놓으라고 하셨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양말을 걸어두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면 ‘꽝!’ 양말은 걸어놓은 그대로였으며 한 번도 선물은 없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전혀 몰랐다. 그저 1년 동안 ‘착한 일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라고 자신을 자책했을 뿐이다.
그때는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옛날 시골 어른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 역시 교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러니 크리스마스이브는 물론이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좀 맹해서 그런지 아니면 순진해서 그런지 선물을 주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중학생이 되고서야 알았던 것 같다.
선물을 한 번도 받지 못한 때부터 30년이 지나자,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부모가 되었다.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으나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명00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아이들에게 말했다.
“1년 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한 아이에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원하는 선물을 가져다주실 거야.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에 문손잡이에다 양말을 걸어두어라.”
어릴 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번도 받지 못한 게 한이 되었던지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아이들에게 선물을 열심히 주었다. 나는 생색을 내는 스타일이었다. 미리 사다 놓은 선물을 볼 수 없는 장소에 숨겨놓고는 입이 근질근질해서 아내의 입막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크리스마스 전날 빔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집에 들어와서 선물을 가져다주는 거 알지? 내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잘 알아. 너희들이 원하는 선물을 갖다주라고 할게.”
아이들은 ‘원하는 선물을 받으려면 일찍 자야 한다’라는 엄마의 말에 양말을 방문 앞에 가지런히 놓고는 마지못해 잠자리에 들었다. 꿈속에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어나 문 앞에 놓여있는 선물을 보며 환하게 웃던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훤하다.
양말은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 주머니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 부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사실을 모르셨겠지만. 올 크리스마스 때는 오랜만에 다시 양말을 걸어놓아야겠다. 혹시 예전에 선물을 주시지 못한 걸 아쉬워하시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꿈에서라도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한국산문 2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