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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귀향    
글쓴이 : 박소현    22-06-12 23:06    조회 : 4,684

어떤 귀향

 

  강원도를 좋아한다. 특히 이른 새벽, 한적한 절간 마당에 서서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몇 해 전 그날도 그랬다. 양양 휴휴암에 가서 머리나 식히고 오려고 당일치기로 나선 길이었다. 강릉을 지날 무렵 간간이 날리던 눈발이 갑자기 폭설로 변해 버렸다. 윈도우브러시를 빠르게 작동 시켰지만 퍼붓는 눈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국도로 들어선 게 잘못이었다. 길은 사라지고 논과 밭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뒤뚱뒤뚱 서로를 위로하며 달리던 자동차들도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져 버렸다. 길이 미끄러워 더 이상 전진을 하기도 힘든데 도로엔 가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무서움이 엄습했다. 가까스로 한참을 더 가니????식당????이라고 쓴 조그만 간판이 보였다. 베니어판에 검은 페인트로 대충 쓴 그 간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마을도 아닌 허허벌판 국도변에 식당이 있다니…. 문을 열자 초로의 여인이 객을 맞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곳은 식당이 아니었다. 가정집 거실에 교자상 두 개를 펴 놓았을 뿐이다. 아침에 밥과 반찬 몇 가지를 해 두고 손님이 오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에 간고등어 한 마리를 구워내는 극히 소박한 밥상이었다. 하지만 땅 밑에 묻어뒀다 내 온 무김치는 그 차고 상큼함이 냉장고에서 나온 김치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식사 후 끓여준 누룽지는 온 몸에 온기를 전하며 쌓였던 피로를 스르르 녹게 했다. 정갈한 성찬이었다.

  초행길의 이방인을 반기지 않는 듯 눈은 점령군처럼 기세를 더하며 퍼부었다. 자동차 바퀴가 눈에 빠져버려 다시 길을 나설 형편도 아니었다. 그 난감함이라니…. 잠자리가 누추하지만 자고 가라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염치불구 하룻밤을 신세지게 되었다. 느닷없이 불청객이 된 내가 안절부절못하자 겨울 강원도에선 가끔 있는 일이라며 위로를 한다.

  말이 식당이지 하루에 손님이 10명도 찾지 않는 집. 마을과 한참 떨어진 곳에 섬처럼 떠 있는 그 작은 집에서 세 여자가 함께 살고 있었다. 거동을 잘 못하는 구순의 할머니와 행동이 약간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60대 여자와 식당 아주머니였다. 90대 할머니는 시어머니였고 60대는 시누이라고 했다.

  그날 밤 나는 주인아주머니와 한 방에서 자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넋두리처럼 길게 늘어놓았다. 도시에 살다 자신과 남편의 고향인 이곳으로 온 게 3년 전이라며…. 체념인지 슬픔인지 가끔은 한숨도 쉬었다.

  “남편은 오래 전에 세상을 떴어요.”

  식당 간판이 없으면 누가 이집을 찾아나 줄까. 그녀는 사람이 그리운 것 같았다. 남편도 없는 며느리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시누이와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니,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도란도란 한참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녀가 어느 순간 곤히 잠에 빠져 들었다. 고단했던지 가늘게 코까지 골았다. 잠자리가 바뀌니 온갖 잡념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세상에나, 이런 고요가 있다니. 세상 저 편 죽음의 계곡이 이렇게도 고요할까? 속세의 모든 거친 말들과 활자들이 사라지고 마당은 온통 순백의 신부처럼 꽃으로 피어났다. 그 꽃은 부질없는 욕망들과 나를 힘들게 했던 타인의 허물까지도 다 지워 버렸다. 산다는 건 어쩌면 갑작스레 내린 폭설로 길이 끊긴 것처럼 수없이 많은 난관들과 부딪치며 끝없이 곡예를 하는 건 아닐까. 처연하리만치 푸른 달빛 하나가 유유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자식 둘을 출가시키고 복지관에서 운동도 하고 노래도 배우면서 노년을 즐겼다고 했다. 그런데 밭일을 하던 시어머니가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 거동이 불편해진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 시골로 들어왔단다. 남편 형제들도 다들 형편이 어려워 어느 누구도 그 두 사람을 보살필 형편이 안 되었다고 했다. 고심 끝에 살림을 정리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그녀의 인생이 폭설에 뒤덮인 도로처럼 막막해 보였다.

  이른 새벽,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느다란 소리에 눈을 떴다. 아주머니가 성경책을 펴 놓고 조곤조곤 기도를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깰 새라 목소리는 낮고 조용조용했다. 나는 잠 든 척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새벽기도는 절박하지 않았다. 밥을 먹듯, 숨을 쉬듯, 기도가 생활인 듯했다. 세상 어느 성직자의 얼굴이 저렇게 평온할 수 있을까? 고통이 산화되어 심연이 된 듯 그 모습이 마치 달관한 수도승처럼, 부처의 온화한 미소처럼 초연하게 느껴졌다. 나이 40이 넘으면 삶의 궤적들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삶이 황량한 겨울 들판처럼 무채색일 거라고 지레짐작한 내 속물근성이 부끄러워졌다.

  남편도 없는 70대의 며느리가 시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만들어가는 생의 긴 여정. 저들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저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문득 주위에서 전해 듣는 고부갈등의 이야기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주머니의 생활은 ‘페미니즘’이니 ‘여성의 자아 찾기’니 하는 단어들을 무색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당하던 일방적 희생이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그 어떤 종교보다도 더 숭고하고 아름다운 휴머니즘이었다.

  아침이 되자 세 여자가 사는 그 집도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부엌에서는 찌개 끓는 냄새가 구수했다. 며칠 시장을 못 가 찬이 없다며 연신 미안해하면서 길손을 위해 따뜻한 밥을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했다.

  오전 10시가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겨울 햇살치곤 온화했다. 집을 나서며 차 트렁크에 실려 있던 믹스커피와 생필품 몇 가지를 드렸더니 땅 밑 항아리에서 꺼 낸 무김치와 누룽지를 잔뜩 싸 주었다. 돈을 드린다고 했더니 무슨 이런 걸 돈을 받느냐며 환히 웃어 보였다. 김치는 지천에 깔린 게 무라 많이 담가 두었던 거고, 누룽지는 손님이 없는 날 남은 밥을 버릴 수가 없어서 만들어 둔 게 처치곤란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날 저녁과 오늘 아침 밥값 외에 다른 돈은 절대 받을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주머니 몰래 지폐 몇 장을 요 밑에 넣어 놓고는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집은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 내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연신 손을 흔들던 아주머니, 그 모습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내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몇 년이 지난 요즘도 눈 내리는 겨울이 되면 내 기억 속에 풍경처럼 남아있는 그 식당이 떠오른다. 아주머니의 말씀은 죽비처럼 오래오래 나를 지켜주고 있다.

 

  "저 불쌍한 사람들을 두고 나 혼자만 편하게 사는 건 사람 할 짓이 아닌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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