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문학회 >  회원작품 >> 
 

* 작가명 : 윤기정
* 작가소개/경력


* 이메일 : yykj5001@hanmail.net
* 홈페이지 :
  창밖의 시간    
글쓴이 : 윤기정    22-06-14 04:08    조회 : 5,383

창밖의 시간

 

윤기정

yykj5001@hanmail.net

 

요즘은 꿈을 꿔도 깨고 나면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꿈을 꾸긴 꿨나 하는 의문마저 드는 일이 잦다. 어렸을 때 꿈을 꾸다 가위눌린 적이 있긴 하지만 꿈에 예지 기능이나 치료의 어떤 단서가 숨어있다는 분석학적 입장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길몽이니 흉몽이니 하는 일에도 관심 없다. 그런데도 잊히지 않는 꿈이 있다. 기억도 선명하고 생시와의 경계도 분명치 않던 꿈이다. 봄이 한창이던 4월 초 어느 늦은 오후였다.

발목을 감는 한기에 잠을 깼다. 밖으로 통하는 문 하나가 열렸고, 그리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640. 시각을 확인하고 창밖을 보니 어스름이다. 탁상시계 알람은 새벽 6시에 맞춰져 있다. 사십 분 전에 알람 소리가 요란했을 텐데 기억에 없다. 아내는 아무리 늦게 자도 알람이 울리면 바로 일어나지만 나는 알람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한다. 어쩌다 듣는 날에도 설핏 깨서 뒤채다가 이내 그루잠에 빠지곤 한다.

아내의 기척이 없다. ‘피곤했나? 게으름을 피우게라고 생각하며 안방을 들여다본다. 아내는 보이지 않고 침구는 여느 날처럼 정리돼 있다. 집안을 둘러본다. 주방은 아직도 잠결이다. 주방 기구며 식기들은 제자리를 지키며 쉬고 있다. 대문 밖에 차가 있는지 확인한다. 없다. ‘방앗간엘 갔나?’ 어제도 복잡하지 않을 때 가야 편하다며 새벽에 고추장 담글 쌀을 빻으러 다녀왔는데, 방앗간 갈 일이 또 생겼을까? 그럴 리가 없다. 마당으로 나간다. 시든 목련 잎 몇 장이 바닥에 누워 있다. 떨어진 작약 꽃잎에 물방울이 맺혔다. 향 달맞이꽃이며 장미, 패랭이꽃이 저마다의 색깔로 어스름 속에서 빛나고 있다. 그날이 그날 같은 봄날의 새벽 풍경이다. 아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꽃밭에 시선을 두고 어수선한 생각의 갈피를 잡으려는데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 혼자 있는 집에서 내게 눈길을 보낼 무엇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시선을 거두어 꽃밭으로 되돌리자 꽃들이 무채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꽃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모양은 그대로인 채 색깔만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소리도 사라졌다. 나뭇잎을 스치던 바람 소리, 꿀벌의 날갯짓 소리, 한길에서 들리던 자동차 소리가 사라졌다. 회색의 세상에 망연히 남은 나를 내다보는 누군가의 윤곽이 창 안에 흐릿하다. 자세히 보니 겁에 질린 회색의 나를 내다보는 그는 나였다. 낯선 눈길의 정체가 또 다른 나의 시선이었나? 어느 내가 나인가? 무서움이 어느 나를 휘감았다.

하릴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내가 언제 밖으로 나가기는 했던 건가? 그렇다면 내다보던 나는 누구였나?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먹먹함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이곳은 틀림없는 딴 세상 같았다. 벽시계가 일곱 시를 알린다. 이쪽 세상에서도 시간은 가나 보다. 소리? 정시마다 울리는 시계의 음악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수도꼭지를 천천히 올렸다. 공기가 밀리는 소리, 이어서 쏟아지는 물소리, 물이 싱크대에 부딪는 소리가 차례로 생생하게 들려왔다. 소리와 시간의 세상으로 돌아온 건가?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온다. 1번 키를 눌렀다. 단축키 1번은 아내의 전화번호다. 통화를 기다리며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동틀 시간이 지났을 텐데 창밖의 어둠은 견고했다. 꼭뒤가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귀에만 집중했다. 두 발목을 꼬았다 풀었다 몇 차례 하고서야 신호음이 멈추고 소리의 통로가 열렸다. 끊길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마음이 바빴다. 서로 다른 세상이 아니기를 바라는 간절함에 어디야?” 묻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어디긴? 현정이네지.” 아내의 목소리에 알면서 왜 물어?’ 하는 가벼운 짜증이 실렸다. ‘현정이는 나를 고모부라 부르는 처조카의 이름이었다. 헝클어진 머릿속이 정리되기도 전에 아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녁은?” ‘저녁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창밖은 진한 어둠이다. ‘먹어야지.’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아직은 아니지. 그냥 꿈일 뿐이야.’

한순간에 분명해졌다. 빛과 소리와 시간의 세상에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냥 있었을 뿐이었다. 아침에 아내가 집을 나서면서 현정이네 들렀다 올 테니 저녁은 알아서 챙겨 드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잡초 뽑고 산책하고 한바탕 씻고 나서 흔들의자에 몸을 묻었다. 더워서 양말 벗고 거실 문 한 짝을 연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생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열렸던 문을 닫고 전등을 켰다. 창밖의 어둠 속에 내 반영反影이 뜬다. 그를 바라보자 그도 이쪽을 본다. 두 개의 내가 마주 섰다. 어느 시간 속의 내가 진짜 나였을까?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0~816)는 죽어서 시를 외는 무덤 속의 자신을 보았더란다. ‘가을의 무덤 속, 나는 죽어/포조의 시를 외고/피도 한스러워 천년을 푸르리라. (秋墳鬼唱鮑家詩 恨血千年土中碧)’ 나도 그처럼, 아니 반대로 저승에서 이승을 보았던 걸까? 야금야금 한지에 물 번지듯 모르는 새 이리로 데려온 것인가? 설움보다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칠 때쯤 아내가 돌아왔다. 사내와 나는 하나가 되었고 세상은 다시 일상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 어느 시공時空의 경계를 소요逍遙한 한바탕 서늘한 꿈이었다. 지금도 어디까지가 꿈이었고 어느 게 생시였는지 알 수 없다.

 <계간 현대수필> 2022. 여름호


 
   

윤기정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44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 글쓰기 버튼이 보이지 않을 때(회원등급 … 사이버문학부 11-26 92583
공지 ★(공지) 발표된 작품만 올리세요. 사이버문학부 08-01 94796
44 요양원의 아우 윤기정 03-12 2614
43 경계에 피는 꽃 윤기정 01-18 2374
42 무엇이 남는가 윤기정 01-18 2222
41 퀘렌시아, 양평 윤기정 01-18 1678
40 J에게 윤기정 01-18 1655
39 덤으로 산다는 것 윤기정 01-18 1437
38 내가 만난 샐리 윤기정 01-18 1214
37 바보 선언 윤기정 08-31 2483
36 말로써 말 많으니 윤기정 08-31 2318
35 돈쭐 윤기정 08-31 2019
34 선생님, 저요,저요 윤기정 03-11 2641
33 윈드벨 윤기정 03-07 2570
32 주례의 시작 윤기정 01-22 3403
31 비멍 윤기정 11-30 3821
30 설거지 윤기정 11-30 5865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