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요람이고 싶었던
나는 검정이다.
나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내가 ‘완전한’ 색이 되기 이전에 나의 주인은 한 남자를 만났다. 둘은 사랑했고 하나가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심연에서 이상한 물질들이 뒤섞여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는 살과 내장을 비우고 뼛속까지 긁어낼 것처럼 자꾸만 게워냈다. 제 영혼이 조각나 흩어지는 환각 속에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구역질을 해댔다. 진저리치며 토해내고 쏟아내도 여자의 몸은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자는 자신을 둘러싼 일련의 현상에 대하여 질문하기 시작했다. 제 몸 어딘가에서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까만 동굴 사진 한 장. 어둠을 가리키며 의사는 열심히 설명하였다. 우주의 블랙홀을 겹쳐놓은 듯, 소용돌이치는 검은 배경 속에 작은 빛이 스며있었다. 어떤 형체인지 처음엔 나 자신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초보 미술 지망생이 4B연필로 대충 스케치해 놓은 것만 같았다. 촬영기를 따라 동그라미 속 형태는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었다. 대체 내 안에 누가 그림을 그리는 것인가. 내 키가 자랄 때마다 빛의 윤곽도 또렷해져만 갔다. 그것은 나와 주인 여자 사이에서 하나의 세계로 자리 잡으며 당당히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임신입니다”라고 말했다. 다음엔 “착상이 잘 되었습니다” 하였다. 다음에는 “심장이 생겼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엔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잘 크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의사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주인은 그게 무엇인지, 어떤 게 자기 세계고 어떤 게 남의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빛인지 그림자인지, 빛의 그림자인지 그림자의 빛인지 새로운 존재를 인정하기 힘들어 했다. 나는 주인 여자가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겨울이 한차례 지나고 나서야 이 여자는 우리 사이에 또 다른 생명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겨우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동그란 그릇이었다. 오롯이 하나의 땅이요 검은 흙이었다. 자갈밭이던 내 화분에 또 다른 우주가 펼쳐졌다는 거. 그것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나, 검정이었다. 그녀보다 더 빨리 새로운 빛을 습득하였다는 자신감에 난 우쭐하였다. 내 고요 안에서 영롱하고 눈부신 색깔들이 불꽃처럼 터지고 있을 터였다. 여자는 그저 그것이, 자기가 갇혀있을 괴상한 색채만 아니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주인과 같은 배에 타기를 완강히 거부했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난 그녀의 도구가 되기 싫었다. 그녀에게 억압받을 바엔 차라리 사라져버리는 게 나을 터였다. 여자는 나와 한통속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회유했고, 우린 결국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러 색으로 노래하고 싶었으나 신은 용납하지 않았다. 피안과 차안의 교차로에서 그녀 없이는 완전한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우린 두 가지 본질을 나눠가지기로 약속했다. 난 최대한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주인에게 간청하려 했다. 그녀를 대신하여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인 내 임무였으므로.
나는 ‘모성의 독재’에서 벗어나고자 그토록 저항하였다. 난 빛의 감옥이 아닌 요람이고 싶었다. 아기를 잉태하고 낳기를 반복하며 나의 세계는 파괴되고 허무해졌다. 육체적 욕망이나 불타는 사랑 따윈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매 순간마다 한 순간이던 쾌락과 절정도 검은 기억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마침내 주인은 나를 버렸다. 내 기쁨이 쇠약해질수록 그녀의 노동은 단순해져 갔다. 난 덧없고 황폐해졌지만 어둠 속에서 날아갈듯이 자유로웠다. 곧 완벽한 색깔이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주인의 목숨을 빌려 이 땅에 태어난 검정이다. 검정이 나이고 그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특별히 빛나지 않는다. 부끄러움도 많이 탄다. 드러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권력이다. 나는 암흑 속에서 너를 발견한다. 불이 켜지고 사그라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너는 내 흙에서 노래가 되고 춤이 된다. 터널 끝, 빛들은 숨 쉬며 꽃피울 준비를 한다. 너는 나에게서 태어나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빨갛고 푸르게, 노랗고 하얗게. 너는 핏줄이 되고 살이 된다. 피와 살이 된 네가 나와 함께 주인을 위한 빛 그림을 그리고 있다. 너와 내가 빛으로 나오기까지 세상은 얼마나 두려운 것이냐. 우린 결국 어떤 색도 아닌 모든 색깔로 노래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나는 위로를 갖고 싶다. 나는 순수를 잉태하고 싶다. 난 너에게 내 전부를 내주겠다.
뼛속을 긁어내고 내장을 비우고 나면 깃털처럼 가벼우리라. 생명의 낱알은 저 밑바닥으로부터, 텅 빈 우주로부터 시작되는 것. 그것은 빛이 없으니 차갑고 장막으로 드리워져 있으니 고요하며 종국에는 외롭고 황량한 곳이다. 나는 째깍대는 허공에서 너를 찾는다. 네 주인의 이름은 검정이다. 그것은 나와 그녀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는 ‘나’가 아닌 우리 모두의 주인에게서 터져 나왔다. 아무 색깔도 아닌 검정, 시작을 노래하는 검정, 다른 색이 될 수 없는 검정, 색깔의 끝인 검정이다. 나를 검정이라 불러다오. 무겁고 침울한 검정. 모든 빛을 감싸 안는 검정. 사라져 버리는 검정.
나는 어둠 속 모니터. 그렇게 환생했다.
-2021《현대수필》가을호, 2022《선수필》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