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는 죄가 없다
진연후
“어머님, 우리 목요일 아침에 영화 보고 점심 먹어요. 어머님은 어떤 영화가 좋으세요? 외국영화는 자막 읽어야 하니까 좀 불편하겠죠? 재미있는 한국영화가 있어야 할 텐 데….”
“야, 무슨 영화면 어떠냐? 너랑 영화 보는 게 중요하지. 근디 사돈헌티 좀 미안하다. 나중에 꼭 니 친정 엄니랑도 영화 봐라.”
시어머니와 통화하는 그녀를 본 동료나 친구들 눈빛에서 놀람과 의문이 묻어난다. 고부간의 대화 내용으로는 조금 낯선 장면인가보다.
몇 년 전에 이동국이라는 축구선수가 아들을 데리고 나오는 TV프로그램이 있었다. 여자아이 쌍둥이를 두 번 낳고 그 다음에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애칭은 ‘대박이’이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보았는데 정말 귀엽게 생겼다. 그런데 기사 댓글에 대박이의 결혼을 걱정하는 글이 있었다. 시누이가 넷이라서 쉽지 않겠다는…. 당시 두세 살밖에 안 된 아이의 장래를 걱정하는 글이 너무 앞서가는 것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결혼한 여자들이 싫어하는 음식으로 시금치가 등장한 지 꽤 오래 되었다. 매우 단순한 연결이다. 시댁과 시금치가 같은 ‘시’자로 시작한다는 이유가 전부이다. 나는 시금치를 싫어할 이유가 없다. 시금치 무침이나 구수한 시금치 된장국은 언제나 기본은 된다. 엄청 맛있다고는 못해도 반찬으로 국으로 충분히 역할을 한다. 물론 영양가도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결혼한 여자들은 죄 없는 시금치를 냉대한다니, 시댁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하면 그럴까?
안도현은 어른을 위한 동화 『관계』에서 관계를 맺고 나면 서로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강아지 한 마리 나무 한 그루를 집에 들여놓아도 눈길 가고 손길 가고 마음 가서 챙기게 되는데, 그리하여 때로는 위안을 얻기도 하고 의지가 되기도 하는데 하물며 사람끼리 인연 되어 관계 맺게 되면 어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 관계만큼은 그리 간단치가 않은가 보다. 어찌 보면 가까운 관계에서 오해도 생기고, 미워하게도 되는 것 같다.
행복하자고 결혼을 하는데 시댁이란 존재가 시금치까지 싫어할 정도로 스트레스라니…. 그러고 보니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은 지나가던 행인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최측근인 경우가 많다. 직장에서 위에 계신 높은 분보다는 바로 한 단계 직속 상사이거나 옆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스트레스를 주는 주범이기 쉽고, 이름도 가물가물한 동창생의 성공보다는 자주 만나는 친구에게 질투가 솟구치고 가까운 이웃과 감정 상할 일이 더 많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법으로 맺어진 가족 간에 쌓이는 스트레스는 쌓이고 쌓이다가 폭발로 이어지기도 한다. ‘4주 후에 뵙겠습니다’라는 유행어를 남긴 TV프로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관계 맺고 풀기가 꼬인 실타래보다 지독한 듯하다.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이삼일에 한 번 전화를 하고, 동사무소나 은행 일 등 어머님이 불편해하시는 것들을 대신 알아보고 처리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과 손주들을 보고 싶어하는 어머님 마음 아니까 시간 내서 함께 식사하는 것뿐이라는 그녀는 적어도 시금치 스트레스는 없어 보인다. 시어머니와 영화를 보겠다는 생각은 꼬리를 물고 그녀의 머리엔 벌써 여름 휴가 계획까지 세워진다.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이면 나눌 것들은 더 많아지고, 그렇게 마음 부자가 되어 삶은 더 풍요로워지리라.
종종 전해오는 그녀의 이야기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밖에서 맛있는 걸 먹으면 처갓집으로 택배를 보내고, 입어보고 신어보고 편한 것이 있으면 장인 것을 바로 주문하는 그녀 남편의 씀씀이까지 알게 되면 행복 ․ 감사 바이러스에 집안의 공기마저 훈훈해진다.
시금치에 별다른 감정이 없는 나는 그녀의 친정엄마와 영화관에 간다.
한국산문 2021년 7월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