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개구리
정민디
숲 해설가로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적에, 물 반 올챙이 반 일 때는 걱정이 없었다. 이른 봄 연못에는 산개구리, 두꺼비, 도롱뇽 등의 올챙이들로 세월 좋았다. 알이 올챙이가 되어 뒷다리가 먼저 쑤욱, 뒤이어 앞다리마저 쑤욱 나오는 족족 아기 개구리가 되어 아장아장 냅다 산으로 엑소더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조해 졌다. 올챙이들이 다 사라지면 무엇으로 어린이들과 숲 활동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5월 중순이 되면 무당개구리의 올챙이가 또 나타나니 걱정 하지 말라고, 그렇게 귀띔을 해주는 선배만 있었던 들 걱정을 덜했을 것을.
여하간 아이들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만 보면 소동이 인다. 달리 내가 끼어 들 여지가 없다. 다투어 뜰채를 차지하며 연못올챙이를 건져 올리기에 바빴다. 봄에 많이 할 수 있는 양서류 교실은 연못에 새까맣게 올챙이가 몰려다니는 것 만 봐도 충분히 자연 관찰이 된다.
그 연못에는 청둥오리에서 부부 한 쌍이 살고 있었는데 매일 물속으로 머리를 콕콕 박고 있다. 나날이 깃털에 윤기가 흐르는가 하면 피둥피둥 살이 올랐다. 반면에 내 수업 자료인 올챙이의 숫자가 현저히 줄었다. 배가 부를 테니 금술은 더 좋아 보였다. 밉살맞아서 가끔은 쫓아버리기도 했다.
다리가 다 나온 올챙이들은 개구리나 두꺼비의 모습으로 ‘우리들은 물뭍동물 이라오’ 라고 입증이라도 하듯이 산으로 산으로 대탈출을 한다. 손톱만한 까만 두꺼비새끼들은 천지를 몰라 사람 다니는 길가로 나와 밟히곤 한다. 그것을 목격한 아이들은 아주 조금씩 이동하는 새끼들을 잡아 컵에다 넣어 얼른 안전한 곳에 놓아준다. 생태를 생각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연못에 연잎이 드리우고 여러 수초들이 자라고 소금쟁이들만이 올챙이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아이쿠! 이 신참 해설가 위기가 왔다.
“선배님! 이제 올챙이들이 거의 다 없어져 버렸네요.”
“ 웬걸요. 자연생태관 물웅덩이에 무당개구리들이 펄떡거려요, 거기 가서 수업하면 되요.”
“ 휴우 살았다”
무당개구리는 끗발이었다. 좀 부풀려 얘기하자면 신의 한수였다.
5월 중순, 그 웅덩이 속 수초에 아직 알이 붙어있고, 불그스레한 창자가 다 비쳐 보이는 올챙이도 있고, ‘나 독 있어’ 하며 유유자적 헤엄치는 어르신도 있었다. 신이 난 나는 뜰채로 잠깐 멍 때린 무당개구리를 잡는다. 비닐봉지에 넣어 어린이들에게 오톨도톨한 등을 만져보게 하고 마치 무당 옷을 입은 것 같은 배의 무늬도 보여주며 나의 인기를 지속할 수 있었다.
무당개구리는 이름부터 호기심이 생긴다. 이야기 거리가 좀 있는 개구리다. 등은 청록과 까망이 섞인 색으로 돌기가 나있고 배는 밝은 붉은색과 검은색의 불규칙한 반점이 있다. 욱식을 하고 식성이 아주 좋다. 천적이 나타나면 배를 드러내며 누워서 죽은 척을 한다. 아이들의 큰 관심은 그것들이 독을 내뿜는다 하여 자기들이 만져보지 못하는 데 있다. 짐짓 무서운 척 하며 호들갑 떠는 게 재미인 것이다.
무당개구리를 보고는 문득 나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당개구리와 나와는 얼마간 평행이론이 있는 듯하다. 누군가에게 늘 호기심에 대상이 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치장을 좋아하는 나는 현란하고 요란하게 꾸미고 ‘나 좀 봐줘’ 한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 이의를 달려는 천적이 나타나면 바로 말에 독을 장착하고, 한바탕 대응 굿판을 벌일 때도 있다. 그래서 구설수도 많이 따른다. 식성이 좋은 것 까지 닮았다. 이 이론은 나를 아는 사람들은 대체로 수긍을 할 것이다. 무당개구리와 엮어보는 것이 그렇게 억지만은 아니라는 것을.
무당개구리가 뒤늦게 나타나서 인기가 있었듯이 약간은 억지지만 이런 엉뚱한 이유로나마 나도 아무개에게 도움이 된 적이, 또는 가끔은 반가움에 대상이 된 날도 있었을까.
이제는 어린이들과 함께 숲 활동을 늘 해야 하는 나는, 거창하지만 선한 영향력을 장착하고 있다고 감히 자부한다. 재미있게 나대고 있다. 그리고 무당개구리처럼 인기 있는 선생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