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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더풀 라이프    
글쓴이 : 박지니    22-11-09 20:56    조회 : 3,732

원더풀 라이프

 

빛바랜 사진 속에서 아기가 웃고 있다. 혼자 앉은 품새가 아슬아슬해 보이는데도 좋단다. 입가만 번들번들한 것이 눈도 코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뭐가 그리 좋은지, 뭐가 그리 웃겨 죽겠다는 건지. 아직 엄마 소리도 하기 전일 텐데. 함박웃음에 그저 같이 웃고 만다.

 

중환자실 유리창 너머로 온갖 기계에 둘러싸인 채 누워있는 아버지. 가뜩이나 거무스름했던 피부색이 더 거멨다. 눈을 감은 얼굴에선 어떤 표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언젠가 가족여행 중에 아버지의 뒷모습이 낯설게 다가온 적이 있었다. 둥그런 어깨선과 굽은 등에 화가 났다. 뭐든 물어보면 답해주는 척척박사, 태산같이 넓은 등에 업혀 어디든 갈 수 있고, 그 위에선 무엇이든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어린 시절. 파도에 모래성이 뭉개지듯 유년 시절의 추억이 뭉개지는 것 같았다. 지난 세월이 해일처럼 나를 덮치는 기분에 숨이 턱에 닿았다. 나는, 옆길을 이용해 재빨리 앞질러 갔다.

왜 그때 손잡아 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적어도 옆에서 함께 걸어갈 수는 있었을 텐데. 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쉬는 날 산에 가자고 하면 없는 일도 만들어 핑계를 댔다. 세례받고 처음으로 맞은 성 목요일에는 발 씻김 예식을 보고 와서 아버지의 발을 씻겨 줬다. 이튿날 그만하라길래 사흘째부터는 하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아버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여전히 나는, 세 손가락으로 아버지의 새끼손가락을 느슨하게 쥐고 있을 뿐이었다.

2018년 봄이 끝나갈 무렵 아버지는 담도암 판정을 받았다. 아버지는 쇠약해진 당신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내게 방에 들어가라고만 했다. 난 그리 하였다.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에도 혼자 병상을 지키게 되면 그 시간이 불편해서 어쩔 줄 몰랐다. 뭔가 해주고 싶어도 뭘 어찌하면 좋을지 알 길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휠체어를 밀어주는 정도였는데, 복도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아버지도 나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을 잡아보았다. 낯선 듯 익숙한 기시감이 마음을 간질였다. 손 뻗으면 조심스럽게 감싸 쥐던 커다란 손. 몸을 마구 흔들면서 걸어도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던 아버지의 손. 정오의 태양 빛에 반짝이는 돌담. 집으로 향하는 아스팔트길 언덕에서 보이는 파란 하늘. 매일 다니는 길이지만 지금 기억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풍경. 점점이 뿌려지는 어린 시절의 조각들.

유치원이 끝나면 아버지가 데리러 왔다. 애지중지하는 고명딸, 그새 누가 업어갈까 걱정됐는지 내가 대문 안에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다시 나갔다. 아이들을 데리러 온 엄마들 틈에 불쑥 튀어나온 머리 하나. 아버지의 손은 커다랬고 따뜻했다. 그 손을 잡고 집까지 걸어오는 내내 그날 있었던 일을 쫑알쫑알 이르면, 아버지는 말없이 미소만 짓곤 했다. 그랬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맞장단 치는 일도 없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기만 했다.

아버지는 그랬다. 표정 변화가 드러날 만큼 크게 웃는 일이 드물었다. 자주 화를 내니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은 아버지의 뒤끝 없는 성격을 알았다. 버럭 하기만 할 뿐, 쉽게 풀릴 것을 알았다. 그저 무뚝뚝한 성미라 속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툴 뿐임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았다. 딸의 애교에 용돈 떨어졌냐?” 하면서도 지갑은 꺼내지 않았다. 평소보다 조금 올라간 볼살과 입가의 씰룩임, 그것이 아버지의 표현법이었다. 무안함에 그 변화를 읽고도 모른 체했으니, 아버지의 성격을 물려받은 탓일 게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무렵부터는 아버지 손을 잡아본 기억이 없다. 만약 이따금 손을 잡아봤더라면 그 시절도 기억했을까? 적어도 처음 잡아본 듯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가슴 한쪽이 아렸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예닐곱 달쯤의 내가 웃고 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웃느라 눈도 코도 보이지 않는다. 사내아인지 계집아인지 구분도 안 되는 것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예쁘게 생겼다고는 못하겠다. 까꿍! 장난에 좋다고 웃는 건지, 아니면 에잇, 지지!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웃는 건지. 못생겼는데 예쁘다. 사진에 담기지는 않았지만, 카메라 렌즈 뒤로 어머니가 있었을 것이다. 렌즈 밖에서 혹시라도 내가 고꾸라질까 봐,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두 손을 대기 중이었을 아버지 모습이 그려진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청춘이었겠지. 당신들만의 꿈을 꾸던 때였을 것이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대학원생과 미국 전문의 시험을 준비 중인 아내. 젊은 유학생 부부에게 아기의 웃음이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었기를.

기억나지 않아도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한국산문, 20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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