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바보들의 학교
내 속에 쌓인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고발하는 마음으로 폭로하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얼마나 참아왔는지,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읽고 알아주길 바랐다. 내게 상처 준 이들이 후회하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종교를 갖게 된 뒤부터 책장 하나를 채울 만큼 종교 서적을 읽었다. 비슷한 내용에 싫증이 날 무렵 서점에 가서 어린 시절에 읽었던 소설을 꺼내 들었다. 아무리 개정판이라지만 내용은커녕 등장인물의 이름조차 낯설었다. 그 순간 벽면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그토록 어리석어 보일 수가 없었다.
외갓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이모가 동화책을 사줬다. 할머니와 이모가 볼일을 보는 동안 책을 다 읽어버리자, 이모는 나를 데리고 책을 산 서점에 가서 다른 책으로 바꾸게 했다. 그날 읽은 『장화와 홍련』의 내용은 금세 잊어버렸다. 서점 주인에게 집에 있는 책이라고 말하면서, 엉뚱하게도 나는 소장할 가치가 없는 책은 기억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 것이다. 거짓말과 맞바꾼 『파랑새』를 우리 집으로 올 때까지 소중히 간직했지만, 그 책을 끝까지 읽은 적은 없었다.
어른들의 책에 손대면서부터 더 이상 세뱃돈을 엄마에게 맡기지 않았다. 부모님의 책에서 어떤 구절을 발견한 뒤로 내 방, 내 것에 집착했다. 은행에 가서 통장도 만들고 방문은 꼭 잠그고 다녔다. 그때 읽었던 책들을 나는 얼마나 이해했을까. 내용조차 생소한 판이니, 그저 글자만을 보고 넘겼으리라. 케이크에서 체리만 건져 먹는 것처럼 내 마음에 드는 부분만 찾아내려고 애썼던 것 같다. 사랑에 빠진 테스가 왜 도피해야 했는지, 갓 결혼한 신랑이 왜 아내를 버리고 떠났는지 열 살, 열한 살 아이가 어찌 알았을까? 청년 베르테르의 선택에 관하여 고민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이아고에게서는 오빠들의 야비함을 찾아내려고만 했다.
난 무엇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파고들어 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 사이에 낀 가시처럼 문학을 불편하게 여겼다. 어쩌면 그 이면을 어린 나도 보았을 것이다. 역사 속 인물들이 투쟁해야 하는 이유를 밝혀내는 순간, 불평하고 미워하기보다 내가 누려온 것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함을 알기에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이제껏 내가 읽은 책들은 초등학교 1학년 때 한두 시간 만에 내 손을 떠난 『장화와 홍련』과 다름없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호수에 비친 나를 마주하는 것과 같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물에 비친 내 얼굴이 살랑살랑 춤을 추기도 하고, 빗방울이라도 떨어지면 요동을 치기도 한다. 하늘이 품은 색에 따라 낯빛도 변한다. 그래도 ‘나’이다. 호수에 담긴 물처럼 모든 기억이 내 안에서부터 비롯된다. 호수에 사는 시간의 요정이 속삭이기라도 하듯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보지 못했던 것과 외면했던 것, 숨기고자 했던 것들을 발견하면, 기억은 그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나약할 뿐 아니라 모순적이기까지 한 자기 모습에 울고 싶어질 때도 있다. 연약함에 가려진 강한 면과 아픔에 지워진 예쁜 추억이 드러날 때면 웃는다.
분명히 잊으려고 했기에 지금에 올 수 있었다. 현실과 동떨어지고 화려함을 담은 이야기들은 꿈을 꾸게 했고 상상하는 즐거움을 알려줬다. 그러나 펜을 쥐자 내가 쾌락만을 좇아왔음을 깨닫고 만다. 흘러가는 시간에 흘려보내려고 하기보다 도망치는 데에만 몰두해 왔다. 오르려다가 만 돌계단 위에 어떤 일이 기다렸을지 알 수 없고, 복수심에 몰두하여 보지 못한 거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놓쳤는지 알 길이 없다. 백마 탄 왕자와 꽃마차에 오르는 내 모습은 상상해 본 적이 있어도, 운구행렬을 이끌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병풍 뒤에 가려진 할머니의 시신처럼 꽃상여 옆을 지키던 할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도대체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사랑을 인정하기 싫었던 게 아닐까.
문학은 나무 그늘처럼 수면에 비친 것을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내가 기억하고 사실이라고 믿은 것이 내 관점에서 바라본 일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소설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고, 내가 쓰고자 하는 것에 한 걸음 다가서야 비로소 진실에 가까워진다. 도망치고 외면했던 것들을 마주하자,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무언가도 크기를 줄인다. 묻어두었던 시간과 스쳐 지나간 순간의 기억을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를 알아갈 때, 지금이 소중해진다. 문학은 어린 시절 나의 유일한 벗이었고, 내가 버린 후 되찾은 것이다.
한국산문 20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