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만나는 나
김삼진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있는 게 시간밖에 없고, 거마비조로 몇 푼이나마 주는 눈치여서 덜컥 약속을 해 버렸다. 자신을 Z방송의 인기프로 <30년 만에 만나는 나>의 PD라고 소개한 그는 30년 전의 김삼진씨가 30년 후의 김삼진씨를 만나겠다고 신청했다며 입을 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녀석이 왜?’ 과거의 내가 그 프로에 출연 신청을 했다는 것은 의외였다. PD는 내가 출연에 동의를 해야 콘티를 짜고 작가를 투입하여 제작에 들어갈 것이라며 출연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다. 그동안 나는 그 프로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는 따져 보지도 않고 재미가 있어서 빠지지 않고 보아 온 터였다. 초기에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만 출연하더니 요즘은 일반인도 출연하고 있었다. 내가 그러마고 하자 그는 방영 당일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프로에 섭외된 사실을 이야기 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통화를 끝내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없는 삶인데 그것을 노출시킨다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웠다. 그리고 나 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내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허락을 해 버렸다.
30년 전이라면 바쁘게 지냈던 시기였지만 그나마 내 생애에 가장 전성기이기도 했다.
약속 당일 방송국 안내데스크에 방문목적을 말하니 얼마 뒤 훤칠한 키의 한 사내가 내려왔다. 그는 명함을 주며 자신이 연락했던 담당 PD라며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방 문에 프로의 타이틀, <30년 만에 만나는 나>가 붙어 있었다. 나는 의심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재미있게 보고는 있습니다만 이게 도대체 될 법이나 한 얘깁니까?” 그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요즘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딨습니까? 《백투더퓨처》*나 《넥스트》** 라는 영화 보셨어요? 인간은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싶어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지요. 쉽게 말해서 그 염원에 IT가 개입을 해서 현실화한 겁니다. 계속 보완해 나가면 더욱 유익한 소프트웨어들이 개발되겠죠. 그가 다른 일정이 있는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아! 김삼진씨가 와 있습니다. 들어가 보세요. 그리고 이 프로는 제작관계자가 참석해서 진행하지 않습니다. 두 분이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지내세요. 취사시설이 되어 있으니 이야기 하시다가 배고프면 요리도 해서 드시고 술을 마셔도 됩니다. 끝나면 알아서 가시면 되구요. 두 달쯤 후에 방영하게 됩니다. 따로 연락이 갈 겁니다.”
방문을 열고 내가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내게로 왔다. 짐작 했던 대로 그는 정장차림이었고 세련돼 보였다. 나의 큰 놈이 제대로 차려 있으면 저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과거 잘 나갔던 내 모습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그 앞에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나는 두 손을 들어 그를 반겼다. 무어라 불러야 할지, 무슨 이야기로 풀어 나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용기를 냈다. “30년만이군. 삼진이. 아주 좋아 보이는데!”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늙은 내가 풀어주어야 할 문제인 듯했다. “편하게 불러. 내가 자네고, 자네가 나인데 뭘 망설이나. 그냥 말을 놓아.” 그가 웃었다. “듣고 보니 그렇군. 하하하. 내가 삼 십 년 후엔 자네처럼 되는 거군. 다행이네. 자네가 건강해 보여서. 이 프로는 내가 작년에 출연신청을 했는데 일 년이 다 되어 차례가 돌아 온 거야. 프로가 대박을 쳤다는군. 요즘은 신청하면 2년 정도 걸린다던가?” 그는 말하는 중간에 제스처를 자연스럽게 취하기도 했다. “젊어서 좋군. 나는 관심은 있었지만 엄두를 못 내겠더라구. 근데 뭐가 궁금해서 신청을 한 거야? 너의 늙은 모습이 미리 보고 싶었어?”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않고 엷게 웃음기만 띄웠다. ‘그렇지 얼마나 신기하겠어. 그리고 궁금한 것도 많을 테고. 내가 쟤라도 그럴 텐데.‘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술상부터 차렸다. 그가 두 손으로 술을 따르려다가 멈칫하더니 한 손으로 따랐다. 나도 그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그는 생각했던 대로 마흔넷이고 영업본부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부장이라면 직장인들의 꽃이라고들 하는데 그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아래에서 치받고 위에서는 찍어 누르니 행복은커녕 고문 받는 기분일 터였다. 내가 그랬으니까. 동종업계의 스카우트 제의에 흔들리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내 생각이 맞았다. 누구라도 흔들릴 것이었다. 당시 나는 업계에서 한창 인기가 많았을 때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세 시간을 넘겼다. 탁자에는 네 병의 빈 소주병이 나뒹굴었다. 내가 한 잔 마실 때 그는 두 잔을 비웠는데 그렇게 빨리 마신다는 것은 그의 불안정한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점차 열을 띄었는데 상사나 부하직원들과의 인간관계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었고 고개를 끄덕이는 횟수가 잦았다. 업무의 쉽고, 어렵고는 역시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이 문제였다. 그는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이렇게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며 아쉬워했다. 나는 새 소주병을 땄다. 몇 가지-잔소리가 되지나 않을까 꺼리긴 했지만-를 이야기 해 주고 싶었다. 그 이야기는 결국 내 스스로가 하지 못했던, 그래서 늘 후회스러운 일들이었을 것이다. 인기를 의식하지 말고 자신에게 충실할 것. 회사를 옮기는 것은 또 다른 고민의 시작일 뿐이니 웬만하면 회사를 옮기지 말 것. 회사일과는 관계없이 인문적 독서를 해서 사유의 폭을 넓힐 것.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취해갔다.
취한 눈으로 나를 멀건이 바라보던 그가 그랬다.
“부럽다”
나는 웃었다. 전성기의 그의 눈에 다 늙어버린 내가 부럽게 보이다니…. 내게서 ‘비움’을 본 것일까? ‘포기’를 본 것일까? 자주 웃고 느긋해 보이니 낙천樂天을 생각했을까. 아마도 그는 고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은 보지 못했는가 보다.
나는 안다. 그는 오늘 내가 해 준 이야기대로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나도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까. 모든 일이나 인간관계는 누가 충고해 주는 것으로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체험으로 극복해야 한다. 그가 앞의 잔을 들어서 나에게 내밀었다.
“오늘 너무 좋았어. 잘 늙어줘서 고마워.”
나도 내 앞의 잔을 들어 그의 잔에 부딪쳤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잘 될 거야. 잘 할 거고. 지치지 말게나.”
우리는 마지막 잔을 마시고 한 참 마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깊게 포옹했다. 주책없이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그를 밀어냈다. 다시 마주보니 그의 눈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엄지를 쳐들며 “굿럭!”이라고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뒤돌아서 몇 걸음 가던 그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나에게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1987년 마이클 J. 폭스 주연의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가 잘못 될 수 있는 미래를 예방한다.
**2007년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영화. 그는 2분 후의 미래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여 LA에 핵폭탄이 설치되는 것을 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