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한번 어때요?
박경임
오스카상을 받은 노년의 여배우 윤여정에게 쏟아지는 찬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평탄치 않은 삶에 대해 생각했다. 오스카상의 메달을 들고 그녀는 두 아들이 일하러 나가라 해서 이렇게 성공했노라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녀는 그 두 아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싱글맘 이었다.
국내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생계를 위해 선택했던 배우라는 직업에 이제는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예쁘지도 않은 자신을 여배우로 성공할 수 있게 해준 이재용 감독에게 감사한다며 <죽여주는 여자>에 대해 언급했다. <죽여주는 여자>라는 제목이 주는 끌림에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영화는 노인의 성과 죽음, 장애인, 성 소수자, 사생아 등의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었는데, 노인의 성과 죽음에 관한 얘기들이 더 깊게 다가왔다. 죽여준다는 표현은 주로 남자들이 관능적인 여자에게 보내는 부러움이기도 하고 야유이기도 하다. 극 중에서 윤여정(소영)의 역할은 종로3가와 파고다 공원 일대에서 노인을 상대로 몸을 파는 일명 박카스 아줌마였다.
소영은 파고다 공원에서 일하는 많은 여자 중에 정말 죽여준다는 소문으로 단연 인기가 있어서 같은 일을 하는 여자들로부터 왕따가 된다. 그녀와 같이 있으면 자신들이 선택이 안 되어 그녀에게 멀리 가라며 싸움이 벌어지기도 해서 그녀는 혼자 다른 지역을 헤매기도 한다. 죽여준다는 또 다른 표현이 나타난 것은 어느 날 단골을 만난 후에 일어난 일이다. 그에게서 가끔 자신을 찾던 한 노인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가 항상 지갑에 현찰을 많이 가지고 다니면서 소영에게도 후하게 대접해주던 고마움에 병문안이라도 해야겠다며 병원을 찾게 된다.
병문안 간 소영에게 노인은 “사는게 창피해, 죽고 싶어. 나 좀 도와줘.” 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평소 깔끔하고 멋지던 그가 누워서 대소변을 해결하고 간병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에 그를 도와주기로 하고 농약을 사서 그의 입에 들어붓는다. 이렇게 시작한 죽음 조력자로서 그녀는 치매가 점점 심해져 돌봐줄 사람 없는 또 다른 노인을 절벽에서 밀어버리고, 아내의 제사를 지내고 그녀를 찾아와 더는 외롭게 사는 것에 자신이 없다는 한 남자와 화려한 호텔 방에 같이 누워 수면제를 먹지만 남자는 죽고 그녀는 일어나게 된다, 그녀는 이렇게 세 사람의 남자를 죽여주는 여자가 되었다. 병마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죽음을 선택한 그들을 도와준 것이다. 그들에게 마음을 다해 곁에 있어 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추위를 많이 타는데 겨울 지나서 감옥에 가면 안 될까요?.”하며 잡혀가는 경찰차 안에서 담담하게 눈 내리는 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 일상적이어서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최근 한 신문에서 읽은 기사에 의하면 종로3가 근처에는 현재도 약 400명 정도의 박카스 아줌마. 할머니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얼굴과 옷차림으로 언뜻 눈에 띄지도 않게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박카스 드실래요?.” 하고 권해서 받아드는 남성을 데리고 근처의 낡은 여인숙으로 향하는 것이다. 나이에 따라 받는 돈의 액수도 조금씩 차이가 나겠지만 정년을 지난 노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액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다는 소영 같은 여자와 일에서는 정년이 되었지만 육체의 욕망은 그대로 살아 꿈틀대는 남자가 만나 치르는 짧은 시간의 거사. 지푸라기 들 힘만 있어도 관계를 원하는 남성의 욕망은 요양병원 간병인에게서도 들은 바가 있다. 남성 환자가 여기저기 주물러 달라 하다가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음경으로 가져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성이나 감성으로 제어가 어려운 것이 본능이라는 것인가 보다. 식욕과 성욕이 본능 중에 가장 두터운 것인 것 같다.
영화의 한 대목에서 마지막으로 죽여 준 남자는 죽기 전에 소영에게 말하기를 “이제 그 짓도 못 하니 남자 인생이 끝났어.” 하며 고개를 떨구던 모습은 이제 다른 어떤 것에도 자신이 없어진다는 고백이었다. 꼭 성관계를 못 하게 되어 인생이 끝났다는 표현은 아닐 것이다. 마음에서 지우지 못한 본능이 몸이 따라주지 않는 데서 오는 괴리감에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남자들은 섹스를 하면서 만족해하는 여자를 보면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온몸이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지고 머릿속이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가득해서 실타래 엉키듯 복잡할 때 나는 관계를 원한다. 모든 것을 잊고 본능에 따라 땀 흘리는 순간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세상 어떤 위안보다 크게 다가온다. 그 순간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역시 큰 것이다. 물론 상대가 나를 사랑으로 안을 수 있어야 한다. 파고다 공원의 박카스 아줌마를 상대로 하는 남자들은 사랑은 없을지라도 거기에서 자신에 대한 위로와 자신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몸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젊어서 노인들의 성에 대해 몰랐듯이, 지금의 젊은이들도 그러하다. 그러나 내가 이제 나이 들어 사그라지지 않는 본능을 다스리며 살아보니 젊은이들의 불같은 성도 중요하지만, 노인들의 잔 불꽃 같은 성도 추잡하다고 치부하지 말고 양지로 끌어내어 이해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육체의 본능을 넘어 관계의 연속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여행 중에 인상 깊었던 광경이 생각난다. 주말이면 동네 시계탑 광장에는 노인들의 댄스파티가 열린다. 옷을 잘 차려입고 주말을 즐기기 위해 모여드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에서 이런 모임을 하면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 하고 생각했다. 개중에는 걷기도 힘들어 상대방을 붙들고 서 있기만 하던 커플도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소년, 소녀처럼 밝고 행복해 보였다. 스킨쉽이 주는 위안은 이렇게 큰 것이다. 나이 들어가며 느끼는 행복감은 지성이나 이성이 주는 것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 많아지는 것 같다.
내 남편이나 애인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스스로 또 다른 의미의 죽여주는 여자가 되어 많이 안아주고 다독여 주어야 할 것 같다. 내 남자가 외로워서 파고다 공원으로 가지 않도록 많이 웃어주어야겠다. 코로나로 개방도 하지 않은 파고다 공원 담벼락에 앉아 장기판을 두드리는 많은 남자의 모습에서 깊은 외로움을 보았다. 소영이 거리에서 “연애 한번 할래요?” 하며 미소를 지었듯이 오늘 저녁 내 남자에게 “연애 한번 어때요?” 하며 사랑의 몸짓을 나누어 보는 것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