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리535
매월 DMZ 평화누리 길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팔십여 명이 함께 길을 걷는다. 오늘 6번째 코스는 파주 출판 단지로부터 반구정까지 장장 21km다. 생태환경을 생각하며 쓰레기와 담배꽁초들도 줍는다. 길을 잃을 염려를 공지하였음에도 잠시 이어폰을 수습하느라 뒤에 쳐져 걸었다. 내가 걱정되었는지 글 모임을 함께하는 정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멀리 시야에서 본대가 사라지는 굽은 언덕길에서 기다리노라고 했다.
그분은 기다리면서 뽕나무 열매를 따는 중이었고, 뱀이 있다고 눈으로 가리켰다. 뱀 허물이겠지 하고 나뭇가지를 당겨보았다. 꽤 굵은 회색 뱀 한 마리가 뽕나무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뱀이 꿈틀하며 움직였을 때 나는 정여사에게 더 놀랬다. 겁을 먹기는커녕 살모사 머리 방향을 관찰하며 오디를 계속 따고 있었다. 움츠린 탓인가 뱀의 머리는 몸체보다 훨씬 작아서 금방 찾아지지도 않았다. 겨우 머리와 눈을 확인했는데 공격해 올 태세는 아니었다. 나 혼자 있었으면 찾지도 못했을 터이므로 뽕나무에 앉은 살모사와 코앞에서 마주할 일도 없었으리라. 급히 오디의 까만 열매와 살모사에 나를 넣어 사진으로 남겨야 했다. 빛의 방향에 맞춰 살모사 눈치 보며 몸을 가까이했다. 포즈를 취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살모사도 나도 오디 따먹으러 소풍 나온 듯 힐끔거리며 웃고 있었다.
정여사는 농촌 생활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 빨간 오디는 새콤하다는 설명과 추억까지 들으며 여유를 부리다가 본대와 더 멀리 뒤처지더니 보이지를 않는다. 들판 끝 산자락을 돌아 왼편으로 사라져간 본대를 쫓으면 되었다. 살모사와 사진 한 컷까지 얻은 뒤라 길 잃을 걱정은 아예 없었다. 점심 장소를 스마트폰으로 찾아놓고는 속사포처럼 빠른 정여사의 경상도 발음에 영어 듣기 시험처럼 집중해야 했다. 내비를 다시 보니 30여 분 남아있던 도착지까지 거리가 40분으로 늘어났다. 10분 동안 반대 방향으로 왔으니 마음이 급했다. 마침 지나가던 버스를 멈춰세우고 문지리 535번지 가느냐고 물었다. 머리가 희끗한 기사는 번지는 모르겠고 문지리는 간다고 하니 우선 타고 본다.
"버스는 기다리면 반드시 와요" 73세 희끗한 기사는 철학자처럼 말했다. 1시간 30분마다 다니는 마을버스는 오른쪽 마을로 들어갔다 돌아 나왔다. 길 왼편 마을도 돌고 있어 이미 내비는 무력해졌다. 내비에게 묻듯 535번지로 묻는 방식부터 어긋났다. 탄현 야구장을 기사분이 모른다니 달리 방법도 없었다. 서두르는 우리를 보고 기사는 굳이 부연 설명을 하고 싶었나 보다. 이 마을은 지금 들어가 봐도 버스를 탈 손님은 없을 거라는 얘기였다. 노인들이 다 죽어 정류소 앞집 할머니만 남았는데 앞으로 버스가 들어올 필요는 없다고 했다.
마침 반대편으로 가는 우리 관광버스를 보고 급히 내렸다. 우리는 방향감각도 잃었다. 목적지는 지척인데 내비 안내로는 두 배나 우회한다. 둘러보니 야트막한 동산뿐인데 산길 걱정할 일은 아니잖는가. 밥차의 식사 배식이 끝나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질러 가야 했으나 곧 길이 막혔다. 임진강변 DMZ 남방한계선 근처라서 군부대가 가로막고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바리케이드 옆에 초소 근무자는 없다. CCTV를 쳐다보고는 달리 우회하는 방법밖에 없다. 일행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그들도 30분 이상 길을 잃고 있는 상황이란다. 다행히 덜 미안하게 되었다.
늦게 일정이 끝나면서 회장이 길 잃은 잘못을 분석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열심히 답사 준비한 것을 회원 모두 잘 알고 있다. 몇몇 회원이 앞장서 나가기 시작했고 잘못 들어선 줄 모르고 따라가다가 보니 생긴 결과였다. 따라가는 것에 익숙한 것이다. 오류가 또 다른 오류를 만든다. 길을 잘 아는 앞사람이 선도해야 하는 이유다. 회장의 진지한 반성은 회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었고 고마움을 느꼈다. 오늘 내가 길을 놓친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만 여기고 있었지만 길을 놓친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뽕나무 오디, 살모사, 시골버스처럼 연결된 고리 속에 혼재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피노키오가 학교 가는 길에 서커스단 따라가듯 길 밖으로 샌 것 같아 즐거웠다. 피노키오를 걱정하는 제페토처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살모사의 식탁에 내가 불청객으로 앉은 줄도 모르고, 어쩐 일로 네가 뽕나무 위에 올라있느냐고 물었다. 뱀이라면 풀숲에서 땅에 배를 깔고 기어 다닐 줄로만 생각했던 내가 틀렸다. 그러고 보니 뱀딸기는 아마 근처에 뱀들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일 것이다. 오디도 그들의 식사 메뉴 중 하나일 것이다. 눈에 안 띄는 그들의 식탁을 함부로 걷어차고 다닐 일이 아니다. 오늘 길을 잃고 생태환경을 실감 나게 체험한 일은 생명 생태 평화를 기치로 하는 DMZ 생태 대장정과도 잘 어울리는 하루였다.
이용만
lym4q@hanmail.net
2023.2 'DMZ 생명 생태 평화' 카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