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놈 없지?
박경임
사무실에 불만 켜놓은 채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 모임은 흑석동에서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초등학교 친구들이 코로나 팬데믹의 방해로 2년 반 만에 만나는 날이다. 은로 초등학교는 1906년 구한말 내무 대신이던 유길준이 세운 학교로 110년이 지난 유서 깊은 학교다. 우리는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나 가난했던 60년대를 콩나물 시루 같은 교실에서, 반찬 이라곤 김치 뿐인 도시락을 석탄 난로에 데우며 시큼한 김치 냄새를 같이 맡고 자란 코흘리개 친구들이다. 지금은 에어컨이 빵빵한 교실에 20 여 명도 과밀 학급이라고 하던데, 그 시절엔 선풍기 하나도 없는 교실에 70명 가까운 아이들이 부대끼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키득 거리며 불평 한마디 없던 시절이었다. 운동장에서 여자아이들의 고무줄 놀이를 방해하며,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던 남자아이들은 이제 그만 또래의 손자를 둔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때 눈물 흘리던 여자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된 남자친구들의 재미있는 너스레에 그날의 분함(?)을 용서했다. 오히려 이제는 여자친구들의 억센 말투에 남자아이들이 주눅 드는 세월이 되었다.
우리가 모두 결핍을 안고 살던 시절, 물론 그 시절에도 부자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다같이 결핍을 견디는 것에 별다른 불만이 없이 희망을 안고 살았다. 아이들에게 부자와 가난의 차이는 도시락 반찬에 계란 프라이나 소시지 정도가 보태지는 차이 쯤으로 가늠 되었다. 개중에는 가난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내성적인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결핍이 거의 같은 수준에 있었기에 아파트 평수를 따지며 친구를 가르는 요즘 아이들과 달
리 그것이 아이들 우정에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결핍의 시대를 같이 견딘 친구들이기에 지금도 우리는 자신의 부를 드러내며 자랑하고자 하는 친구는 모임에 남아 있지 않다. 누구든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우리 모임이 장수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또한, 남자친구들은 직함으로 대별 되던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며, 여자친구들 역시 누구 엄마나 아내를 떠나 오롯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울 수 있는 자
리가 주는 매력이 있다. 남 녀 구분 없이 나이 들어 영희야 철수야 부를 수 있는 장소는 여기 말고는 없을 것이다.
중학교 진학 시험을 치렀던 우리는 어린 시절에 공부로 학교로 차별도 받았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별 셋으로 예편한 장군이나, 무궁화 셋으로 예편한 대령이나, 작대기 세 개로 제대한 장병이 한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을 넘긴 친구도, 막노동으로 살아온 친구도 격의 없이 만나면, 샛강에서 벌거숭이로 물장구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래서 모임이 있는 날이면, 각자의 생업을 접고, 전국 각지에서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자신이 농사지은 쌀로 떡을 만들어 무거움도 잊은 채 가져오는 친구의 마음을 알기에 떡 한 조각을 씹으며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오늘도 30 여명이 모여 어디에서도 가지기 힘든 편안함을 느꼈다. 한 친구의 말처럼 우리 나이에는 새로운 만남을 만들기에는 어색하고 힘들다. 그래서 지나온 시절의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이 편하고, 더군다나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지금의 이 친구들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두 줄짜리 진주 목걸이와 때 이른 밀짚모자로 치장하고 나온 여자친구에게 예쁘다는 찬사를 보내며 즐거운 곳, 남녀의 구별 없이 반가움에 허그가 가능한 곳, 그렇게 이 모임은 모두를 편안하게 안아준다. "2년 반 동안 아무도 죽은 놈 없지?" 하며 소리 지르는 한 친구의 소리에 박수로 화답하며 우리는 그렇게 늙어간다. 정말 그동안 암과 투병 하면서 잘 견뎌준 친구에게 마음속 깊은 애정으로 감사를 보냈다. 이제 자신의 건강을 돌보며 사는 것에 전념할 것을 서로 권하며 한 사람씩 하던 일을 그만두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잘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걸을 수 있을 때 여행도 가고 우리는 그런 약속을 하면서 즐겁다. 백세를 살다 가신 친구 아버님이 같이 놀아 줄 친구가 없는 것이 가장 아쉬웠다고 했지만, 우리에겐 여기 이 친구들이 있어 절대 외롭지 않은 노년이 되리라 믿는다.
이곳에서 만나 사랑을 이어가는 한 커플에게 한 놈은 전립선 암이고 한 놈은 허리가 아프니 안됐다며 슬픈 얘기를 농담처럼 던지지만 진정한 위로의 마음을 알기에 서로 바라보며 박장대소할 수 있는 만남이다.
이번 모임을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하게 된 친구는 두툼한 회를 서비스로 내오며 마냥 즐거워했다. 그런 마음이 하나하나 모여 우리의 시간을 풍요롭게 하고 아쉬움으로 헤어지게하는 것이다. 친구들과 건강하게 오래 볼 수 있기를 다짐해 보며, 서울 야경을 별처럼 안고 돌아온 행복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