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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서운 편지    
글쓴이 : 노정애    12-05-16 20:06    조회 : 6,761
 
무서운 편지

                                                                                                   노문정 (본명;노정애)

 여성가족부에서 남편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무슨 내용일까 하는 염려와 호기심에 퇴근해올 주인을 기다리지 못하고 개봉했다.
  ‘고지정보서’ 라는 한 장의 공문서.  2011년 2월 11일 신설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의거한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제목이 ‘고지대상자의 신상정보 고지’이다.  이력서처럼 사진, 이름, 나이와 키, 몸무게, 실거주지 등이 적혀있다.  주소를 보니 우리 집에서 마을버스로 네 정거장 거리에 사는 사람이다.  성 범죄자인 사진 속 남자가 여고생에게 어떤 죄를 저질렀으며 어떻게 법률 선고를 받았는지 자세하게 적혀있다.  법에 따라 가해자의 거주 지역에 있는 초, 중, 고생의 모든 가정에 신상정보를 주지시키기 위해 보낸 것이었다.
 이 정보는 공개하지 못하며 교육기관의 교육과 직업훈련과 관련하여 차별할 목적으로 사용하면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유의사항도 있다.  열람할 수 있는 웹사이트 등이 적힌 안내사항과 뒷면에는 성폭력범죄 예방 및 대처 요령과 최근 도입된 제도, 신상정보 우편고지 절차 안내까지 자세하게 나와 있다. 나라에서 할 조치는 절차에 따라 다 취했다는 이 친절한 편지를 받자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내용을 숙지하자 편지를 받았을 때의 호기심은 공포로 바뀌었다.  언젠가 뉴스에서 이런 고지를 한다고 했을 때는 남의 일처럼 흘려들었다. 막상 받고 보니 성 범죄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에 덜컥 겁부터 났다.
  우리 집에는 고3인 작은딸이 있다. 아이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바로 독서실로 가서 12시에 집으로 온다. 바로 귀가해도 좋으련만 간식만 먹다가 잠이 든다며 시간이 아깝다고 지난해부터 독서실에 다녔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을 때면 데리러갔다. 심야의 짧은 데이트는 예비숙녀 막둥이의 재잘거림을 듣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가끔 혼자서 집에 오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 가로등 불빛을 따라 아파트 사이로 난 길들은 인적이 없고 몇 대의 차들만이 무심히 지나간다. 조용한 동네라서 별 무서움 없이 왔었다.  독서실의 위치는 가해자의 거주지와 우리 집 중간쯤에 있다. 이제 혼자 오게 할 수 없게 되었다.
  남편은 이 편지를 보더니 딸에게 범인의 얼굴을 기억해 두라는 당부부터 했다. 걱정만하는 나와는 달리 아파트만 즐비한 동네 탓과 집값 떨어질 걱정까지 하는 현실적인 가장이다. 아이는 어두워지면 혼자 나가지 말아야겠다며 편하게 다니던 동네길이 범죄현장이 될 수도 있다고 무서워했다. 가해자와 가까이 살고 있는 친구들 걱정을 하면서도 같은 아파트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말도 했다.
 자신의 신상정보가 모두 노출된 가해자는 결코 편안하지 않으리라.  어쩌면 어린 시절 한 번의 실수로 평생 성범죄자라는 족쇄를 가지고 살아야하는 이 처벌이 가혹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이 정도는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하지 않을까?  다시는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 음지에 있는 예비 가해자들도 알고 있으라는 경고성 편지도 될 것이다. 물론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예비 피해자들 역시 조심해달라는 예방의 목적도 포함 되어 있으리라. 이렇게 해서라도 아동. 청소년 성범죄가 줄어들기를 바랄뿐이다. 미리 이런 법들이 시행 되었더라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성범죄들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편지는 우리가족의 일상생활을 흔들어 놓았다. 아이는 등하굣길 지금까지 이용했던 한적한 지름길은 더 이상 다니지 못하고 늘 주변을 살피며 긴장하게 되었다. 물론 조심이 가장 좋은 예방법이리라. 나 또한 집 밖을 나서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핀다.  혹시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주민들 속에 숨겨진 예비 범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다.  동네 가로등 불빛조차 더 어둡게 느껴져 어두워지면 길 건너 가게에 가는 것도 꺼리게 되었다. 남편은 딸에게 호루라기를 달아주고 성범죄 예방법을 숙지시키고 귀가 시간에는 반드시 부모에게 연락하라는 등의 잔소리가 더 늘었다.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웃들도 쉽게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편지를 받은 세대들, 특히 딸을 둔 가정은 우리 집과 사정이 비슷할 것이다. 그저 조심해야하는 무서운 세상이다.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세상은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 학창 시절 언니와 나에게 만은 어둡기 전에 들어오라고 그리도 엄하게 하셨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냥 무서운 세상이라고 들었던 기억, 방송이나 신문에 나오는 사건 사고와는 또 다른 이 한통의 친절하고도 무서운 편지. 아동·청소년 성범죄에 대한 심각성이 내 안방까지 습격해 버렸다. 
  이웃을 의심하고 예방법을 숙지해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며 ‘당신 아이는 이제 당신이 지켜야 합니다.’라는 경고가 담긴 무서운 편지다. 살벌한 세상이 되었다.  난 오늘도 내 딸을 지키러 밤 12시에 독서실로 간다. 수능이 끝나면 심야 데이트는 끝나겠지만 무서운 세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항상 조심하는 방법 말고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참 슬픈 현실이다.   
  
                                                     <에세이스트> 2012년 5/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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