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도 둥글둥글 내 마음도 둥글둥글
호박 속에서 호박이 자라는 걸 보셨나요?
아내가 마루에 신문지를 깔고 늙은 호박을 여러 조각 내서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도와주려고 아내 옆에 앉았다.
“친구 모임 때 호박죽을 가지고 간다고 했으니 호박죽을 쑤면 나 좀 차로 태워주소!”
“그럽시다.”
흔쾌히 답했는데 아내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여보, 호박 안에서 새순이 자라는데 본 적이 있는교?”
“호박씨가 흙 속에서 자라지, 호박 속에서 자란다고?”
내가 콧방귀를 뀌자,
아내가 호박 껍질을 벗기다 말고 호박씨 모아 둔 곳을 손으로 뒤적였다. 호박씨가 움터서 콩나물처럼 자란 호박 모종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와~ 진짜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하던교?”
신기해서 호박 모종을 한 손으로 들고 바라보았다. 모종이 새끼손가락만 한데 줄기는 가늘고 연녹색의 떡잎 두 개가 나 있었다.
호박씨는 어둠을 헤치고 뿌리를 내릴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더구나 호박 안에 수많은 호박씨가 들어있는데 씨 하나만 뿌리를 내렸을까. 호박은 썩지 않고 싱싱한데 그 속에서 뿌리를 내리다니 위대한 생명력에 놀라서 가슴이 뭉클했다.
생명의 탄생은 언제나 어두운 곳에서부터 시작이 되는가. 어둠에서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내딛는 발걸음! 발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남아있는 늙은 호박 하나를 소쿠리에 담아서 식탁 한쪽에 모셔놓았다.
식탁에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 때마다 호박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아내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호박에 밥풀이 붙었소? 뭐 그리 뚫어지게 쳐다보는교!”
“호박을 바라보면 힘이 생겨서 호박도 둥글둥글 내 마음도 둥글둥글하다오!”
세상을 살다 보면 슬프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어쩌다 고독이 밀려오기도 한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잠 못 이룰 때 호박을 바라보았다. 호박 속에서 자라던 모종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였으므로.
“뭘 그까짓 것 가지고 풀이 죽어있니? 나를 바라봐. 외로움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내디뎠어. 어느 날 빛이 보이더라.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어. 그러나 내 삶은 여기까지였나 봐. 내 모습을 너한테 보여주기 위한 삶! 그러니까 온갖 걱정 하지 말고 툴툴 털어버려.”
어디선가 메아리처럼 들려와 차오르던 허공이 희망으로 채워졌다. 늦가을에 호박을 수확하고 나면 봄이 오기까지 지루했는데, 올해는 식탁 위에 늙은 호박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폈다.
마음의 밭에 호박씨를 심었다. 며칠이 지나 호박씨가 싹이 나서 얼굴을 내밀었다. 새싹이 자라 줄기가 서고 줄기는 척척 번져서 울타리를 타고 지붕 위로 힘차게 뻗었다. 호박꽃이 목젖을 드러내어 환하게 웃고 있을 때 벌들이 꿀을 따느라 정신이 없다. 호박잎이 여름 한철 푸르게 수놓고 호박이 익어갈 때, 지붕을 쳐다보면 보름달이 떠 있는 듯 마음이 풍요롭다. 호박 한 덩이는 친구 주고 또 한 덩이는 동생네 주고!
호박 농사를 지었으니 이제 슬슬 호박죽 배달이나 가볼까?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는데 바람이 불고 겨울비가 세차게 내린다. 아내한테 물었다.
“마님, 호박죽 배달은 낼 언제 가요?”
수필과 비평 20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