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은 가방이다
몇 년 전 일이다. 합평 모임에서 ‘가방’을 소재로 수필을 쓰기로 했다. 나는 무엇이든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까지는 늘 자신만만한 편이라, 가방쯤이야, 이렇게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날짜가 넘어갈수록 예상과 달리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도통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단 시집을 뒤졌다. 시는 종종 수필 쓰기의 마중물이 되어주니까. 이번에도 시에게 나의 수필을 부탁하는 마음으로 책장 세 칸 정도에 꽂혀있는 시집들을 한 권씩 뽑아 목차를 훑었다. 제목에 ‘가방’이 들어가는 시가 두어 개 정도는 있겠지, 하고 기대하면서.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가방’은 나타나지 않았고 시간만 흘러갔다. 오기가 났다(이런 오기로 인한 에피소드로 늘 글을 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가방에 관해 쓴 시를 발견만 하면 수필은 저절로 물꼬가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집의 시집을 모조리 확인해도 찾을 수 없어 바로 잠실 교보문고로 달려가 시집들을 살펴봤다. 역시 없었다. 서점에서 시집의 영역이 점점 좁아지는 현실에서 오는 씁쓸함까지 더해져 허탈감은 극에 달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머리를 쥐어뜯다 가방이라는 시를 찾지 못한 내용에 자잘한 이야기를 더해 대충 옴니버스 형식으로 써서 제출했고, 호되게 혹평을 받았다. 주제가 없는 산만한 글이라고…. 쓰라린 심정으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방은 트라우마처럼 내 가슴에 쾅 하고 도장을 찍었다. 언젠가는 꼭 쓰고 말겠다. 다짐했다. 그 뒤 나는 습관적으로 가방을 생각하게 되었다. 가방과 기억, 가방과 나, 가방과 여자, 가방과 남자, 가방과 세계, 가방과 기타 등등.
우리 인생에는 ‘타이밍’이 어긋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간절할 때는 나타나지 않던 것이 일이 다 끝난 후에 ‘짜잔’ 하고 얄밉게 고개를 내미는 일. 이번에도 그랬다. 시간이 흐르니 ‘가방’에 관한 시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허둥대던 나를 비웃으며 일부러 숨어 있었던 것처럼.
수필 합평이 끝나고 한 달 후쯤, 책상 위에 얌전히 누워있던 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에서 「가방」이라는 제목을 발견했다. 목차에 또렷하게 있었다. ‘가방’이라는 글자가!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가 있을 거라 믿는/ 잘못된 저녁에는/ 저마다 고래에서 내려/ 신발을 털고 가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무심히 밥냄새를 핥거나/ 철저히 눈을 감는다’
드디어 가방을 소재로 한 시를 발견했지만, 생각처럼 수필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시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만 하게 되었다. 나는 고래 안에 있는 걸까, 가방 안에 있는 걸까? 읽을 때마다 생각했다. 나의 바닥은 여전한가, 움직이는가. 가방은 우리를 담고 우리를 데려간다. ‘우리’라는 집단 속에서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걸까? 그리고 어느 날은 생각이 터무니없이 부풀어져 ‘지구도 커다란 가방이 아닌가?’라고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황혜경 시집 『느낌 氏가 오고 있다』에도 가방에 관한 시가 있었다. 「모호한 가방」. ‘바지의 외부의 바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 바지에 의해/ 가방이 완성될 때까지/ 나는 외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를 반복하다가’ 시인은 수선집에서 바지로 가방을 만들며 ‘안과 밖’의 모호성에 대해 사유한다. 조해주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의 「가방의 깊이」도 있었다. 여기서 가방은 결국 ‘나’이다. ‘가방의 밑부분을 손으로 슬쩍 받쳐 보는 순간/ 나는 잠시 들어 올려진다’ 가방은 입구도 내부도 넓지만 잡히는 것이 없다고 시인은 말한다.
가방에 대한 트라우마는 가방이라는 활자를 보면 오래 그것을 바라보게끔 해주었다. 가방은 우리를 그 안에 태우기도 하고, 안과 밖이 모호하기도 하고, 더러는 ‘나 자신이 되기도 했다. ‘경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가방은 결국 경계를 만드는 건가. 뭐 이런 생각. 나는 연인에게 집착하듯 가방에 집착했다. 가방의 무엇이 우리 삶의 메타포가 될 수 있을지, 가방이 어떤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지….
그러다 진짜 가방을 잃어버렸다.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여행을 갔다 돌아오던 날. 인천국제공항의 위탁 수하물을 찾는 곳. 컨테이너 벨트가 승객들 가방을 다 토해내고 멈추었는데도 내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아시아나항공 분실 신고 데스크로 갔다. 코펜하겐에서 독일 항공기로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아시아나항공 비행기로 갈아탈 때, 내 가방은 비행기에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직원이 설명했다. 나는 신고서를 접수하고 집으로 왔다.
매일 항공사 직원과 통화했다. 여전히 내 가방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내가 탔던 독일 항공사에서 답이 없다고. 혹시 모를 분실 보상을 위해 가방 안에 있는 물건의 리스트를 미리 작성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너무 늦게 작성하면 기억을 못 할 수 있다며.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점점 침울해졌다. 내 옷들(아, 새로 산 청바지!), 안경들, 한정판이라 더는 구할 수 없는 세일러 만년필, 가벼워서 늘 가지고 다니던 우산, 그리고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에서 산 엽서. 그 미술관은 그동안 내가 다녔던 여행지 중 가장 멋진 곳이었다. 미술관을 방문하면 엽서를 사서 주방 벽에 붙여 놓는 게 나의 루틴인데. 루이지애나 엽서도 다른 엽서와 함께 저기에 있어야 하는데….
경제적 손실 외에도 그것을 사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추억들. 무심결에 카디건을 찾다가, 안경을 찾다가, 우산을 찾다가 그것의 부재를 깨닫고 가벼운 상실감에 심장 언저리가 잠시 술렁거리겠지? 부정적인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은 과감히 잊어야 했다. 잃어버린 것도 억울한데, 그것 때문에 내 일상이 축 늘어지는 건 더 억울했다. 그래서 나는 가방을 잊기로 했다. 아깝다고 여겼던 물건들이 없다고 사실 크게 불편할 것도 없었다. 가방이 추억이라고? 상실감에 쓸쓸해질 거라고? 그건 내가 붙인 추억, 내가 만든 감정이 아닐까? 잡다한 것들을 담은 가방이 없어졌을 뿐이다. ‘가방은 그냥 가방이었다.’ 가방을 털어버리니(그러다 가방이 다시 나타나면 선물 받은 기분일 것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잃어버린 가방은 자연스럽게 가방의 의미를 찾던 나의 집착에 가 닿았다. 당연한 연결이었다. 가방은 단지 가방일 뿐이라고 반복하며 다짐하는데,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를 붙잡고 있던 가방 트라우마, 정확히는 내가 놓지 않고 꽉 잡고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떨어진 가방은 한껏 부풀어 있어 가방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가방 안에 지나친 사유를 욱여넣으려 했다. 과연 그것들을 사유라고 할 수나 있을까, 의심도 들었다.
‘가방은 가방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뒤집어 탁탁 털어낸 후 가방 본연의 자리에 잘 가져다 놓았다. 홀가분했다.
* 『수필과비평』 5월호 신작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