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정 기심(機心)
이용만
휴전선 따라 도보로 걷기 좋은 길이 만들어져 있다. 서쪽 김포에서 동쪽 고성까지 한반도를 횡단하는 평화누리 길이다. 매월 한차례 생명과 환경을 생각하며 쓰레기를 주우면서 구간을 걷는다.
오늘은 반구정(伴鷗亭)이 도착지다. 반구정은 방촌(厖村) 황희(黃喜 1363~1452)정승이 낙향하여 여생을 보낸 파주 임진강변의 정자이다. 황희 정승을 걷기 여정에서 만날 수 있다니 반가웠다. 쉬는 도중에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정 작가가 갓길의 뽕나무를 알아채고는 오디를 따서 일행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오디에 홀렸을까? 나 홀로 뒤처져 걸었다.
멀리 70여 명의 본대는 굽은 언덕 길을 접어들고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기다리겠다는 전화가 왔다. 오디를 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시골 생활을 모르는 게 없다. 나름 부지런히 도착한 내게 눈짓으로 뽕나무 위 뱀이 있다고 가리켰다. 꽤 굵은 회색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올라앉아 있었다. 설마~ 뱀 허물이겠지 하고 나뭇가지를 살짝 당겨보았다. 꿈틀하며 뱀이 머리를 들었고 움찔했다. “어쩐 일로 네가 뽕나무 위에 올라있느냐”라고 속으로 물었다. 뱀이라면 풀숲에서 배를 깔고 기어다닐 줄로만 생각했던 내가 틀렸다.
피노키오가 학교 길에 서커스단 따라가듯 뱀과 오디와 정 작가의 빠른 사투리에 넋이 나갔나 보다. 본대를 따라잡기는커녕 길을 잃었다. 10분 동안 반대 방향으로 왔으니 마음이 급했다. 택시라도 타야겠는데 마침 마을버스가 지나가니 멈춰 세웠다. 문지리 535번지 가느냐고 물었다. 운전기사가 번지 수는 모르겠고 문지리는 간다고 했다.
"버스는 기다리면 반드시 와요" 73세 머리카락이 희끗한 기사가 도인처럼 말했다. 1시간 30분마다 다니는 마을버스는 오른쪽 마을을 돌아 나왔다. 다시 길 왼편 마을도 돌고 있었다. 이미 휴대폰 내비(Navigation) 마저 무력해졌다. 우리를 흘끔 보던 기사는 부연 설명을 하고 싶었나 보다. 이 마을은 지금 들어가 봐도 노인들이 다 돌아가시고 정류소 앞집 할머니만 남았다고 했다. 버스가 굳이 들어올 필요는 없다고 했다. 기다리면 반드시 온다는 버스 아니던가? 차라리 내려 걷기로 했다. 점심 식사 장소에 도착해 보니 본 대도 길을 헤매 30분이나 늦었다. 눈총을 피하게 되어 천만다행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섭씨 30도를 넘는 날씨에 일행 중 절반은 걷기를 포기했다. 더위에 지친 이들과 뒤따라온 행사 버스에 올라 반구정에 먼저 도착하였다. 당초 목표대로 완주하려는 30여 명이 도착할 때까지 오히려 여유로웠다. 배낭을 베개 삼아 나무 그늘에서 잠을 청하는 이도 있었다. 황희 정승의 사당과 기념관도 둘러보며 해설사의 설명을 따로 청해 들었다.
고려 말 두문불출하기로 작정한 72 현(賢)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며 관직을 버린 터였다. 젊은 황희도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조선왕조 태조는 능력 있는 구관을 포용하며 실리와 명분을 챙겼다. “왕조는 바뀌었다 해도 백성은 그대로이지 않은가” 하며 설득을 계속하였다. 태조의 설득과 두문동 현인들의 추천에 성균관 학관인 황희는 두문동을 나와 세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정승으로만 24년을 지냈다. 그는 관직에서도 인재가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다.
황희는 정의롭고 미래를 내다보는 청백리였다. 사리가 분명했고 ‘청렴결백(淸廉潔白)’만이 힘의 원천임을 알고 실천했다. 어느 날 회의 때 김종서(金宗瑞 1383~1453)가 술에 취해 비스듬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황희는 하급 관원에게 일렀다. "지금 병판(兵判)의 앉은 자세가 바르지 않으니, 의자 다리가 잘못된 모양이다. 어서 고치도록 하라!" 그 말을 들은 김종서는 머리끝이 저절로 쭈뼛해짐을 느끼고 자세를 바로 고쳤다고 한다. 김종서는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호방했지만 자중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게 될 것을 황희는 예견했던 모양이다.
황희 선생을 생각하며 반구정 정자에 오른다. 반구정에서 북녘을 바라보면 개성의 송악산이 보였고 남쪽을 바라보면 한양의 삼각산이 보였다. 번갈아 고려와 조선을 회상하였을 때 왕조는 무엇이며 백성은 무엇인가? 두문동을 나왔던 젊은 선비는 50여 년 관직을 뒤로하고 갈매기와 벗하고 싶었으리라. 임진 하류 넓은 모래펄에 날아들 갈매기를 눈으로 좇는다. 남과 북이 대치한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어도 갈매기는 개의치 않는다.
21km 완주로 뿌듯함이 배어있는 건각 30여 명도 도착하였다. 경모당 툇마루에 자리하고 강의를 준비한 유영봉 교수를 따라 ‘기심(機心)’을 두 번 외쳤다. 기심은 기계지심(機械之心)의 준말로 간교하게 책략을 꾸미는 마음이다. 도가 사상가 열자《列子》의 황제〈黃帝〉편 ‘갈매기와 노는 사람(해상지인의 기심)’에서 유래된 이야기다.
‘바닷가에 살던 한 소년은 갈매기와 친해 손바닥에도 날아왔다. ‘한 마리라도 잡아 보라’는 부모의 말에 소년은 이튿날 해변에 나갔는데, 갈매기들이 공중에서 빙빙 돌기만 하고 내려오지 않았다.’라는 고사다. 소년의 ‘잡겠다는 기심(機心)’을 알았는지 갈매기는 내려앉지 않았다. 기심을 쉽게 말하자면 ‘뭘 어떻게 해보려는 속셈’이라고나 할까. 기심이 가슴속에 있으면 순수 결백한 원초적인 힘이 소실된다.
반구정 하면 곧 떠오르는 다른 이름의 정자가 압구정(狎鷗亭)이다. 한명회의 호이기도 한 압구정에는 정자의 표지석만 남아있다. 그도 갈매기를 벗 삼아 벼슬을 내려놓겠다며 짝 반 (伴)을 모방하여 가깝게 친하다는 뜻의 익숙할 ‘압(狎)’을 썼다. 하지만 계유정난(1453년 단종 1년) 때 살생부를 만들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한 한명회에 대한 역사의 심판은 준엄했다. 그가 역사의 궤적에서 간신 모리배로 남은 것은 기심 때문이었을까? 압구정에는 갈매기가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이었다 하더라도 한명회의 기심(機心)이 곳곳에서 보였다. 정치인일수록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기심(機心)을 잊는 망기(忘機)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 어찌 백성을 마주할 수 있는가? 오늘날 궤변과 다수의 횡포를 일삼는 세태를 보면서 강자와 야바위꾼들의 기심(機心)이 우려스럽다. 하긴 대놓고 벌이는 보이스 피싱(Voice Phising)에도 속수무책인 세상이다.
부지불식간에 나도 어떤 기심을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지나 않았는지... 오늘 걷던 길에서 뽕나무 위 뱀과 나는 기심이 생길 틈도 없이 서로 두려웠다. 두려워서인지 살모사의 오찬을 방해했던 내가 자리를 떴다. 생명 생태 평화를 기치로 하는 DMZ 대장정이 아니던가. 그나마 뱀에게 냅다 나뭇가지를 흔들어 대지 않아 다행이었다.
『한국산문』2023.6